[만물상] 북한의 '백마 신화'

조선일보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12.04.16 23:05 | 수정 2012.04.17 05:14

    2006년 5월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여담 삼아 농촌 얘기가 나왔다. 한민구 남측 수석대표가 "농촌 총각들이 몽골·베트남·필리핀 처녀와 많이 결혼한다"고 하자 북측 대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의 혈통을 중시해온 민족의 특이성이 사라질까 걱정이다." 한 대표가 미소 지으며 "한강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수준"이라고 받아넘겼지만 북측 대표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잉크 한 방울도 떨어뜨려선 안 된다."

    ▶북한은 민족 단일성을 '민족 번영을 위한 투쟁에 필수적인 단합의 정신적 원천'으로 여긴다. 순혈(純血)주의는 폐쇄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북한은 "착하고 정의롭고 고결(高潔)한 우리 민족이 고난의 역사를 겪은 것은 지도자를 못 만난 탓"이라고 선전한다. 오래 기다린 끝에 김씨 일가를 지도자로 모시고 '우리 식대로' 앞날을 열어 간다는 논리다.

    북한은 민족의 순수와 지도자의 신성(神聖)을 하얀색으로 연결해낸다. 백의민족, '항일투쟁 성지(聖地)' 백두산, '백마 탄 항일유격대장' 김일성…. 김일성이 피곤해서 졸자 백마가 주인이 깰세라 나무 그루터기를 넘지 않았다는 북한식 신화도 있다. 보천보전투를 그린 기록화 '보천보의 횃불'에서 김일성은 하얀 외투를 휘날린다. 모여든 민중 역시 흰옷을 입고 머리에 흰 수건을 둘렀다.

    ▶부산 동서대 교수인 북한학자 브라이언 마이어스는 김일성 우상화가 1930년대 일왕의 이미지를 흉내 냈다고 본다. 군국주의 광풍 속에 히로히토 일왕은 '순수한 민족'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다. 일왕은 눈 덮인 후지산을 신성하게 여겼고, 하얀 애마 시라유키(白雪)를 타고 군대를 사열했다. 마이어스는 북한을 지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극단적 민족주의를 앞세운 일본식 파시즘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 체제를 극우로 규정했다.

    ▶그제 김일성 생일 100년을 기념하는 평양 열병식에 백마 타고 하얀 망토를 두른 기마부대가 등장했다. 사열대 수뇌부도 하얀 군복 차림이었다. 김일성이 옛 소련군 장교 예복을 본떠 즐겨 입었다는 옷이다. 올해 초 김정은 생일에 맞춰 만든 다큐도 백마 탄 김정은으로 시작한다. 할아버지 통치 스타일을 따라 해 인민의 마음을 얻어보려는 장치들이다. 그러나 권력은 상속 재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어도 카리스마는 상속할 수 없는 법이다. 김정은의 연설과 몸짓도 시들어버린 김씨 일가의 카리스마를 감추지는 못했다. 열병식의 복고적 소품들도 낡은 활동사진을 돌리는 듯했다. 김일성시대를 재연(再演)하려는 안간힘에선 김씨 왕조의 정통성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감지한 북한 지도부의 다급함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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