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뉴욕 특파원

얼마 전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부근의 한 식당에서 한국 주재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왔을 때 일이었다. 취한 듯한 백인 청년들이 지나가며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중국 패거리들아!" 동양 사람이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뉴욕에 중국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라고 쳐도, '패거리(gang)'란 말은 비하(卑下) 의도가 명백했다. 기자는 "중국인도, 패거리도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대신 머쓱하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들이 사과할 리도 만무할뿐더러, 쓸데없는 말싸움을 벌이기가 번거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괜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영어로 전화 취재를 하는 일은 늘 어렵다. 한국 사람이라면 "어디요?" 하고 무뚝뚝하게 되묻는 일이 다반사다. 통화를 하다가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 미국인들끼리는 "다시 한 번 말해달라" "실례지만 뭐라고요?" 등의 표현을 주로 쓴다. 질문을 못 알아듣겠다는 말은 '너의 억양 때문에'라는 불만을 내포하고 있다. 문구(文句)만이 아니라 수화기 너머 들리는 싸늘한 말투가 어수룩한 영어 때문에 내가 무시당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알게 해준다. 맨해튼에서 식재료상을 하는 50대 한국계 남성은 "가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평가 글을 남길 때 종종 '영어도 못하는 동양인 주인'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들에겐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니 무시하지 말라"는 반박이 먹히지 않는다.

최근 미국에서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찢어진 눈(chinky eyes)'이라는 표현이 논란이 됐다. 농구팀 뉴욕 닉스의 중국계 미국인 선수 제러미 린은 하버드대 시절 '스위트 앤드 사우어 포크(Sweet & Sour Pork)'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직역하면 '달콤새콤한 돼지고기', 의역하면 '이 탕수육아' 정도 되는 표현은 명백히 동양인을 비하한 말이다. 미국에 사는 동양인들은 린을 '찢어진 눈'에 비유한 스포츠 칼럼니스트의 글에 분개했다. 요즘 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설움을 느끼던 기자는 이 논란을 보면서 한국에서 절대다수로 살며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업신여겨 흔히 써온 '짱○○' '쪽○○' '양○' 같은 비속어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근 수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조선족이 눈총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하필 며칠 후 조선족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질러 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커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범인은 조선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 부적응자였던 탓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버지니아공대에서 2007년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지른 조승희나 지난 2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총격 사건을 벌인 고수남이 한국인이어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 것과 같은 논리다.

미국 유니언신학교 교수였던 랠프 소크먼 목사는 "소수자일 때는 용기에, 다수자일 때는 포용에 도전하라"고 말했다. 범죄자에 대한 징벌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겠지만, 사회의 특정 소수 집단에 화살을 겨누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