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극작가

대본 쓰는 노릇하며 그 중 잘한 행동을 꼽으라면 연출을 해봤다는 점이다. 지난해 초연된 연극 '판 엎고 퉤!'의 기억이다. '연출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험적인 체험을 해보라'는 이윤택 선생의 권유 때문이었다. 연출이라곤 어깨너머 귀동냥이 전부였던 내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배우 김소희 선배와 주인공 전용 배우 윤정섭 그리고 10년 경력의 관객 압도 전문 배우 윤종식 선배를 출연배우로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고, 선생께선 특유의 살짝 치뜬 눈길로 씨익 웃으시며 재가를 했다. 아마 뭔가를 예감하고 너 한 번 당해보라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보통 극작가에게 가장 큰 슬픔은 자기 대본이 잘려나가는 고통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예방주사가 확실했다. 한 권의 희곡 가운데 제목만 남기고 다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의 입장에서 연출을 겸하므로 원본에 가까운 연극이 나올 줄 알았다. 득의양양했다. 하면 잘 될 줄 알았다. 풋내기의 오산이었다. 제목을 포함해 다섯 번을 고쳤다. '밥이 감옥이다'는 연극 주제를 놓고 무한정 입씨름했다. 배우들은 경험의 논리로 무장하고 희곡의 전선을 넘어 돌격해왔다. '글말'만 아는 사람은 '입말'이 잘 안 들리게 마련이다. 나는 무조건 싸웠고 연전연패하고 무기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희곡은 개인의 공간이지만 연극은 공동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촌철살인의 명문장만 꿈꿀 줄 알았지 정작 타인과의 소통에선 빵점이었던 거다. 배우를 통한 이해와 납득 없이는 무대화와 더불어 관객을 만날 수 없다는 각성이 이어졌다. 세상 모든 일은 직접 해봐야 안다. 그전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