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돌려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날/첫사랑의 그 시절을.'
괴테는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는 게 꽤나 어려웠나 보다. 한국의 영화감독들과 드라마 PD들에겐 한가인이라는 배우가 있으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김도훈 PD는 '해를 품은 달'(MBC)에서, 이용주 감독은 '건축학개론'(22일 개봉)에서 첫사랑 여주인공으로 한가인을 꼽았다. 이 정도면 그를 '첫사랑 아이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실제 '한가인=첫사랑의 아이콘'은 흥행 코드가 됐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400만 관객을 넘었고, '해품달'은 시청률 40%를 넘었다. '건축학 개론'도 개봉 8일 차인 29일까지 100만명 이상을 동원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한가인을 만났다. "화면보다 실물이 예쁘다"고 하자 그는 나지막하고도 또렷한 말투로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얘기한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내 모습을 직접 보여줄 수도 없으니…"라고 했다.
―'말죽거리 잔혹사'이후 7년 만의영화인데 또 누군가의 첫사랑이다.
"기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역이다. 감독은 내가 감독이 생각한 첫사랑의 이미지에 부합한 데다 의외의 느낌이 있어서 캐스팅했다고 한다."
―의외의 느낌이 뭔가. 혹시 욕하는 건가?(영화에서 한가인이 맡은 '서연'은 술에 취해 욕을 내뱉는다)
"감독은 생각보다 까칠하고 당찬 내 모습이 극 중 서연과 비슷하다고 하더라. 난 원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욕하는 장면은 내가 가진 의외의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진짜 통쾌했다. 더 세게 갈 걸 그랬다."
―'말죽거리~'에선 여고생 역이었는데, 어느새 30대 이혼녀 역할을 맡게 됐다.
"나이가 드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다. 20대의 젊음은 감당하기 힘들었다.우연히 항공사 모델로 뽑혀 목표 의식도 없이 일을 했다. 그때 기억은 잘 나지도 않는다. 어렸을 땐 나만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청순한 첫사랑 이미지'로만 굳어지는 건 아닐까.
"어릴 때는 그게 답답했다. 난 여성스럽지도 않고, 곱거나 청순한 여자도 아닌데 왜 다들 그렇게 보는지….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안 나가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도 없다. 이런 문제로 답답해하니까 어떤 분이 '너한테 그런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다'고 했다. 나한테 여러 가지 면이 있는데 일정 부분이 많이 드러난 것 같다."
―'해품달'에선 연기력 논란이 나왔다.
"사극이 어려웠던 게 아니라 캐릭터가 어려웠다. '허연우'란 캐릭터는 내 실제 성격과 아주 다르다. 그는 용서와 포용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답답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많이 배웠다."
―항상 연기보다 외모가 더 화제가 된다. 안타깝진 않나?
"일단 외모가 기본이 돼서 연기자가 될 수 있었으니 감사한다. 외모 때문에 연기가 빛을 못 보는 면이 없진 않지만, 그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난 호평에도, 혹평에도 흔들리는 편이 아니다. 결과나 평가보다는 내가 어떤지, 뭘 하고 싶은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지가 중요하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
"고민 중이다. 어떤 게 맞고, 좋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악역도 좋고, 남성스러운 역할도 좋을 것 같다. 나에게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못 보여준 부분을 보여주고 싶다."
―고민이 많아 보인다.
"어렸을 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인격적·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요즘엔 '왜 그래야 하나' 싶다. 사람들의 잣대에,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아 답답하고 힘들다. '인생은 짧은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사춘기가 뒤늦게 찾아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