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때문에 눈치 볼 일 뭐 있나요. 신랑·신부가 주연이면, 우린 초대손님일 뿐인데요. 한국에서 제 또래 혼주들은 사돈 눈치 보느라 다들 고생하지만, 독일 사위 얻은 저는 그런 점에서 해방되니 결혼식 전체가 너무나 홀가분하고 즐거웠어요."
10년 전 퇴직한 황종원(65)씨는 지난 2월 아내와 함께 8일 동안 태국 코란타(Koh Lanta)섬에 다녀왔다. 그냥 해외여행이 아니었다. 해변가 백사장에서 열리는 딸(32·항공사 승무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평범하게 살아온 황씨 부부에게 딸의 선택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꿈결 같았다. 딸 결혼식에 이들 부부가 쓴 돈은 1500만원. 부부의 비행기 티켓, 태국에 8일 동안 머물며 쓴 비용 500만원, 그리고 딸에게 너무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건넨 1000만원이 전부였다.
"독일인 사위가 대기업 경영컨설팀 팀장인데 호기심이 많아요. 독일은 성채(城砦)에서 결혼식을 많이 한다는데, 본인은 남들하고 똑같은 결혼식이 싫다더라고요. 애들이 인터넷을 뒤지더니 태국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했어요. 독일 사위 얻는 시점부터 남과는 다르겠다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심은 들지 않았어요. 더구나 비용도 자기들이 다 모아놨으니…. 우린 그야말로 '초대받은 손님'처럼 호강한 거죠."
황씨의 딸은 독일에 머물며 승무원으로 일하다 지금 남편과 6년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에 앞서 황씨 부부는 7박8일 일정으로 사돈이 사는 독일 베를린에 날아가 상견례도 했다. 따로 호텔 잡지 않고 예비 사돈 집에 머물며 함께 여행 다녔다.
"안사돈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인데, 우리 온다고 휴가를 내고 가이드로 나섰어요. 한국에선 사돈이 그렇게 어려울 수 없는 사이인데, 허물없이 대해주니 팔짱 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다녀도 불편한 줄 몰랐어요."
예단·예물 얘기도 없었다. 황씨 부부가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예의는 차려야겠다"면서 100만원짜리 이불을 보내려 하자, 사위가 펄쩍 뛰며 "독일에선 이런 거 아무도 안 한다"고 극구 말렸다. 황씨 부부가 고집해서 30만원짜리 침대 시트를 선물하고 넘어갔다. 그런 황씨 부부에게 사돈 집에서 보낸 예물은 동서독 통일 기념 사진집 1권과 베를린 장벽 무너졌을 때 나온 콘크리트 한 조각이었다. 황씨는 "두 집안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인데, 센스 있지 않으냐. 명품보다 좋더라"고 했다.
신랑·신부에게 주는 시계도, 가방도 없었다. 대신 황씨는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한 듯해도 놓치는 것이 없다' 는 명심보감 문구를 직접 붓글씨로 써서 사위에게 줬다. 안사돈이 황씨의 딸에게 돈 주고 산 책 말고 손수 만든 책을 두 권 건넸다. 황씨의 딸이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묶어서 만든 사진첩과 지인의 덕담을 모은 메모집이었다.
태국에 모인 하객은 양가 부모와 신랑·신부, 친구들까지 '달랑' 19명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휴가를 얻어 자비(自費)로 왔고, 모든 사람이 어울려 꿈같이 몇날 밤을 보냈다.
"주위에 자식 결혼시킨 지인들 보니, 온갖 인연을 따져서 사람 부를 걱정, 결혼식 치를 걱정, 집 사줄 걱정, 예단 걱정, 혼수 걱정에 흰머리가 나더라고요. 아직 결혼 안 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얘가 한국식으로 간다고 할까 봐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