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평(10~13㎡) 남짓한 초가집에는 사람과 가축, 세간살이가 뒤엉켜 있었다. 바닥에 헝겊 깔아 자리를 만들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산파는 꼬깃꼬깃 접어둔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어 비닐봉지를 손에 끼고 아이를 받는다는 것이다. 분만이 끝나면 물에 대충 헹궈 다시 쓴다고 했다.

지난 1월, 정부의 원조 사업을 돕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김의숙(66) 연세대 간호학과 명예교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 우리나라 상황이 떠올라서다.

지난 1월 에티오피아 오로미아주 헤토사 지역에 가족계획사업을 알리는 해외 원조사업에 참여한 김의숙 교수가 현지인들과 어울려 환하게 웃고 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월남한 김 교수는 "피난민 생활도 해봤고, 지독한 가난도 겪어봤다"고 했다. 1964년 연세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가족계획사업을 연구하면서 서울·경기·충청·강원 지역을 돌아다녔다. 열 집 중 아홉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분만하던 시절이었다. 아이 낳다 죽는 산모도 많았고, 소독이 안 된 낫으로 탯줄을 자르다 아기가 파상풍에 걸려 죽기도 했다. "병원에 못 오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어요.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아픈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게 낫다' 싶어 간호사로 일하는 대신 가족계획이나 지역 의료 분야를 공부하기로 했어요."

당시 한국엔 간호대학원이 없어 해외로 유학을 가야 했지만 돈이 없었다. 그러다 1972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받게 됐다. "운이 좋았어요. 원래 중국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원조를 못하게 돼 한국으로 눈을 돌린 거죠. 다들 '김의숙이 이제 한국에 안 올 거다'라고 했어요. 간호사는 미국서 취업이 잘되니 가난한 모국에 돌아올 리 없다는 거죠."

김 교수(앞줄 오른쪽)가 40년 전 미국 록펠러재단의 원조를 받아 미국 보스턴대에 유학하던 시절이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김 교수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1980년 한국에 돌아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국내 보건·의료 사업을 수행했다. 4년 전부터는 에티오피아, 파푸아뉴기니 등에 대한 해외 원조사업에도 참여한다. 지난달에는 일주일간 방글라데시를 다녀왔다. 올해부터 한국국제협력단이 추진하는 방글라데시 제1호 간호대학원 설립 사업 때문이다.

"지금 방글라데시를 보면 우리나라 1960~70년대가 떠올라요. 간호사는 턱없이 부족하고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은 절반이 넘고…. 간호대학원이 생기면 유학을 가지 않아도 자국에서 보건·의료 전문가를 키울 수 있으니 나라 발전에 밑거름이 될 거예요."

김 교수는 "원조받아 유학 갔다가 40년 만에 원조 주는 사람이 됐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원조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에게는 숙제가 하나 있다. "다른 나라 원조 덕에 공부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원조받는 게 창피할 때도 있었어요. '도움을 받는 나라가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