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47초의 이 짧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단 두 번 입을 연다. 아침 양치질을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옛날 살던 마을의 묘지에서 옛 이웃들과 부둥켜안고서. 늙은 화가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올해 90세의 백영수 화백이다.
'벌이 날다'(1998),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등 철학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선보여온 민병훈(43) 감독은 2010년 여름부터 2011년 1월까지 프랑스 파리, 마르세유 인근 시골 마을, 서울 등을 배경으로 백영수 화백을 카메라에 담았다.
1977년 파리 요미우리 화랑의 전시 제안을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하다 지난해 1월 영구 귀국한 백 화백의 삶이 암시적으로, 그러나 예리하면서도 무게 있게 고요한 화면에 담겼다. 화가의 마음속에 도사린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주제로 삼은 영화의 제목은 '가면과 거울'. 민 감독은 "한국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50대 중반에 외국으로 떠나 30여년간 정착하고, 다시 이 땅에 묻히고 싶다는 열망으로 귀국한 백 화백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 구구절절이 대사를 넣을 필요 없이 그의 표정, 시선, 그림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민병훈 감독이 백영수 화백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10년 여름.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본 것이 계기였다. "백 화백의 '모자상(母子像)'과 '여백' 시리즈의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화풍에 반했다. 직접 만나보니 진지하고, 조용하고, 수도자 같은 분이었다. 그분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백영수 화백은 배우 경험이 없는데다 고령. 그러나 민 감독은 "백 화백이 워낙 마음이 젊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표정 하나하나가 진실했다"고 했다. '가면과 거울'은 민 감독의 또 다른 극영화 '터치'(유준상·김지영 주연)와 함께 올 5월 칸영화제에 출품된다.
공개된 것은 '가면과 거울'이 처음이지만, 민 감독이 화가 영화를 찍은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작고한 권옥연 화백과 김흥수(93) 화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미 촬영을 마쳤고, 1년 전부터 가나아트에서 운영하는 장흥의 미술가 레지던시에 머물며 민중미술 출신 화가 임옥상(62)과 팝 아티스트 마리킴(35)의 사계(四季)를 촬영하고 있다. 사진가 김중만(58)을 주인공으로 세워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 '굴업도'도 제작 중이다. 그는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곤 한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개봉할 때도 화가 이수동 선생의 그림을 포스터로 썼다. 자연히 화가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실존 인물이 주인공이자 배우지만, 100%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민 감독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화가들의 삶인 셈. 2009년 하반기 김흥수 화백을 촬영할 때는 '정돈되지 않은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김흥수 화백은 사람들을 만날 땐 항상 한껏 치장을 하고 나온다. 나는 치장 이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었다. 병석에 있을 때의 모습처럼 최대한 '보통 때'의 생활 위주로 촬영했다. 여인 누드를 많이 그려서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분 내면의 우울과 고독, 그와 함께 김 화백이 항상 강조해왔던 '감성'과 '자유'를 담고 싶었다."
권옥연 화백은 2010년 봄부터 열 달간 촬영했다. 민 감독의 마음을 끈 것은 '화단의 신사'로 불렸던 권 화백의 풍자와 해학. "권 화백의 그림은 회색빛으로 어둡지만, 그분 자체는 굉장히 밝은 분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성격을 대비시키고자 했다. 권 화백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수많은 방이 있겠지만, 그는 특유의 유머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민 감독은 "계속해서 화가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지만 오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번 다룰 때는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해야죠. 무엇보다 대상과 저 사이에 '꽂히는 게' 있어야 하고요. 한 인간의 삶을 심층적으로 조명한다는 것이 제 본업인 극영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결국 영화란 '어떻게 하면 이 이야기를 가장 진실하게 만들까' 하는 고민의 문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