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소설 출간 다음날 인터넷에 사본… 울먹이는 저작권

조선일보
  • 김충령 기자
    입력 2012.03.10 03:04 | 수정 2012.03.11 10:04

    여러 명이 책 나눠서 타이핑…포털 카페서 '텍스트본' 판매

    판타지 소설가 정모(39)씨는 최근 자기 소설이 텍스트파일 형식으로 만들어져 인터넷 네이버 카페를 통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책이 출간되면 여러 명이 나눠서 타이핑(typing)을 한 뒤 텍스트파일로 만들어 합치는 이른바 '텍본(텍스트본을 뜻하는 은어)'이 유통된 것이다. 정씨는 네이버 카페에서 텍본을 팔고 있는 이들에게 메일·쪽지 등을 보내 수차례 "판매를 중단하라"고 요청했지만, 이들의 저작권 침해는 계속됐다. 정씨는 지난달, 자기 소설을 텍본으로 만들어 문화상품권 등을 받고 판매한 용의자의 인터넷 아이디를 찾아 서울은평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정씨에게 돌아온 경찰의 답은 "수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작권 침해와 같은 온라인상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경찰은 네이버 등 해당 포털 사이트에 용의자의 정보를 요청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 회원 가입 당시 입력한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통해 경찰은 수사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월, 네이버는 회원 가입 때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이름과 생년월일만 입력하면 가입할 수 있도록 회원 정보 관리 절차를 개편했다. 기존 회원 3400여만명의 주민번호도 모두 폐기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정보통신법 개정에 따라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지 않도록 바꿨다"고 밝혔다. 다른 포털 사이트도 회원들의 주민등록번호를 폐기했거나, 폐기할 예정이다.

    성인이면 포털 사이트가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저작권 침해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다. 만 18세 이상이 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게 되면 주민등록 자료를 경찰에서 받아 관리하기 때문에 이름과 생년월일만으로도 용의자를 찾을 수 있는 것. 하지만 미성년자는 경찰에 자료가 없다. 청소년들이 온라인을 통해 저작권을 침해해도 처벌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판타지·로맨스 소설 등 텍본으로 인한 저작권 침해를 호소하는 작가들은 텍본 판매자 대부분이 청소년층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로맨스 소설 작가는 "텍본을 만들어 판매·유통하는 청소년 대부분이 그런 행위가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네가 뭔데 그러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고 했다.

    온라인상 저작권 침해에 대한 처벌 공백이 생겼지만, 온라인상의 출판물 저작권 침해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판타지·로맨스 소설 등 출판 분야 온라인 불법 저작물 단속 수량은 2011년 6500여만건으로 2010년 3000여만건보다 배 이상 증가했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가 발전하며 텍본을 다운받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 특히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는 출간 다음 날이면 인터넷을 통해 텍본을 구할 수 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원작 소설을 출간한 파란미디어 관계자는 "포털 사이트에 게시 중단 요청을 하는 등 온종일 단속하고 있음에도 그 수가 줄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저작권을 위반하였는데도 용의자를 파악할 수 없어 사건을 종결하면 이와 유사한 범죄를 유발할 수 있고, 용의자들의 법적 책임성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작가 정씨는 "작가들이 공들여 쓴 책이 100~200원에 거래되는 것을 볼 때 자괴감이 든다"며 "이런 풍토에서 제2의 해리포터 같은 작품이 한국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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