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왜 피로한지 아십니까? 곳곳에서 '넌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과도한 긍정성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일하다 쓰러지면서도 스스로 착취한다는 인식을 못 하는 겁니다. 스스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는 거죠."
재독 철학자 한병철(53·사진)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현대인의 '긍정주의 성공 신화'에 경고장을 던졌다. 신간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출간에 맞춰 방한한 그는 8일 서울 광화문에서 간담회를 열고 "현대사회는 성과 사회이고, 자기 착취 시대"라고 규정했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영악한데요. 과거엔 노예를 부리는 '타인 착취'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다가 한계에 다다르니까 '자기 착취'를 만들어낸 겁니다. 요즘 독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번아웃(burnout·소진)'이에요. 과거 여유의 상징이었던 독일 대학들도 이제는 성과 내기에 급급해서 교수들이 쓰러질 때까지 일을 하고 있어요."
한 교수는 "'안 돼, 하지 마,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해' 했던 부정성 시대에서 '할 수 있다'가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 사회로 20세기 후반 이후에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 사회'라 명명했다.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자유를 주면서 더 많은 생산성을 발휘하게 됐지만,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게 되는 거죠. 타인에 의한 착취라면 주인을 죽이면 자유를 얻지만, 내가 주인이자 노예니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면서."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울증은 긍정성 과잉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질병. "Yes, we can(할 수 있어)"을 부르짖다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우울증이 발발한다는 게 그의 얘기다.
책을 번역한 김태환 서울대 교수는 "긍정의 힘을 설파하는 자기 계발서가 많이 팔리고,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허각을 보며 사람들이 열광한 것도 능력을 최상 가치로 만드는 성과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에 개개인이 사로잡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쏟아진다는 것.
책은 '멀티태스킹도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퇴화'로 규정한다. "멀티태스킹은 수렵 자유 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습성이죠. 먹이를 먹으면서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새끼들도 감시해야 하니까요. 현대사회는 점점 더 수렵 자유 구역처럼 변해가면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럼 해법은 뭘까. "요즘엔 '쉬어라'를 강조하는 책도 많이 나오지만, 그건 노예의 쉼에 불과해요. 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입니다." 그는 특히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이 해결의 열쇠"라고 했다. "제가 장자를 공부하려고 한문 문법책도 10권 정도 샀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쓴다, 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 그걸 통해서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한 교수는 독일에서 책 20여권을 낸 중견 철학자. 공학도이던 그는 독일로 건너가 철학, 가톨릭신학 등을 연구했다.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현대 유럽 철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이례적인 경우. 2010년 10월 독일에서 출간된 '피로사회'는 지금까지 3만부가 팔렸다. 독일 '디 차이트' '슈피겔' 등 주요 언론이 서평을 내보냈고,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되면서 지난해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서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