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조선녀자의 치마가 짤바지고 양장(洋裝)이 류행함과 함께 조선 부인도 그 다리 때문에 걱정까지 하게 되엇습니다."

조선일보 1929년 7월 18일자는 여성미의 기준이 '얼골로부터 다리의 미'로 변했다며, 조선 여성의 새로운 걱정거리를 전했다.

조선 여성은 "치마나 장옷 속에 얼골을 기피 감추고 그 좁은 시야를 통하야 겨우 세상을 바라보고 잇섯슬 따름…"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장옷과 트레머리'가 '몽당치마와 단발'로 눈부시게 바뀌었다.(1934년 7월 4일자) 이화학당은 1913년 가슴을 치마 허리띠로 꼭 졸라매는 바람에 중국의 전족처럼 조선 여성의 가슴 발달을 막는다며, 허리띠 대신 어깨에 걸치는 통치마를 입도록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물자 부족이 심각해 탄생한 서양의 '숏트 스커트'가 1920년 조선에 유입되면서, 1924년에는 무릎 아래 두세치(6~9㎝)까지 짧아졌다. 이때부터 '그리 곳지 못하고 미끈하지 못한 다리의 곡선미(?)가 거리를 활보'했고, 이는 각선미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했다.(1939년 6월 2일자)

“다리는 넘우 살이쩌도 못쓰고 넘우 말러도 못씀니다. 꾸부러진 것이야 물론 안되지요” 라며,‘ 다리 미용술’을 소개한 지면.(1929년 4월 25일자)

여성들이 다리를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거미줄보다 설핏한' 양장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을 보고 화가 안석영은 '불구자에 갓가운 톄격!'을 지적하면서, "짜른 목, 일짜 억개, 기다란 허리, 짜르고 굽은 다리"로 세상의 이목을 끌지 의문을 표시했다.(1929년 7월 27일자)

그러나 양장은 갈수록 확산됐고, 각선미를 가꾸는 일은 여성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미는 다리에도 다리의 미용술'(1929년 4월 25일자), '체조와 마찰과 탈지로' '휜 다리도 곧게 펼 수 있다' 같은(1931년 9월 8~9일자), '각선미 가꾸는 법'은 '부인난'의 단골 기사로 등장했다. 일본에서 한 외과의사가 '무릅팍 아래 살을 베어내 호리호리한 다리를 만들어 달라'는 '모던껄'의 괴상한 주문을 받고, "수중다리처럼 살이 찐 녀자의 다리를 세워놋코 여덜치가량이나 썩썩 비어낸 후, 뼈와 근육 사이의 지방층을 글거내 버리고 삽시간에 짼자리를 꼬매"는 수술에 성공, '안짱다리와 수중다리를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도 '부인난'을 장식했다.(1929년 7월 14일자)

양장의 유행은 미의 기준을 갈수록 '얼골로부터 육체로' 이동하는 경향이 농후, "억개와 가슴은 탄력이 잇서 보히고, 유방은 퉁퉁 부은 듯 볼룩하게 소사 오르고,… 통통한 궁덩이가 그리 크지도 또 적지도 안코 다리는 날신하게 길어야" 미인 소리를 듣게 됐다.(1935년 3월 1일자)

'밋긴한 다리를 그대로 내 놋는 노-스타킹…, 구두도… 발구락까지 다 보이는 것'이 유행, '발톱마다 빨강 물감을 드리는 일'이 벌어지면서 '족선미(足線美) 시대'란 말이 나오더니(삼천리 1935년 7월 1일자), '아모리 고흔 다리라 할찌라도 양말 선택 잘 못하면 탈'(1936년 4월 10일자)이요, '양장의 몸맵시는 걸음걸이'에도 주의를 쏟아야 했고(1936년 7월 21일자), '젓통 언짠은 분은 양장하면 안 어울려'(1937년 3월 23일자)…, 하면서 '모던 껄'들은 점점 '온 몸'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