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74) 전 헌법재판소장은 지난 10년간 조선일보를 가장 깐깐하게 읽어온 독자 중의 한 사람이다. 2002년 4월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은 이래 교사, 주부, 작가, 변호사, 기업인 등 각 분야를 대표한 위원들과 매월 한 차례씩 조선일보 보도의 정확성을 꼼꼼하게 따지는 심판관 역을 해왔다. 신문 보도 때문에 손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005년 초 독자권익위 제도를 규정한 신문법이 마련됐으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김 위원장은 독자권익위 월례회의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잘못된 기사가 나가면 독자센터에 전화를 걸어 지적하는 '비평가'다. "선천성 소아마비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소아마비는 출생 후 구인성(口因性)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질병이 아니다." "반증(反證)과 방증(傍證)은 법률적으로 다른 용어인데, 잘못 쓰고 있다"…. 독자들의 비판과 오류 지적을 정리해 전(全) 기자들에게 발송하는 조선일보 독자센터 이메일에선 종종 김 위원장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김용준 위원장이 이번 달 임기가 끝나는 5기 독자권익위원회(임기 2년)와 함께 위원장직에서 물러난다. 조선일보 창간 92주년을 맞아 지난 10년간의 독자권익위활동을 중심으로 김용준 위원장을 인터뷰했다. 김 위원장 서가엔 '우리말의 예절' '우리 말 바로쓰기'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같은 우리말 관련 서적과 '연세한국어사전'같은 국어사전이 여러 권 꽂혀 있다. 그는 "법관으로서 판결문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참고서의 하나가 국어사전이었다"고 했다.

"판결문은 일단 문장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철저하게 확인했어요. 사건의 진실은 수사기록을 맞춰봐야 알지만, 판결문은 일단 그 내용 자체가 앞뒤가 맞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법관들이 쓰는 판결문은 읽어보면 문장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72자짜리 판결문은 또 뭔지…."

―지난달 5기 독자권익위 마지막 회의 때, "지난 10년간 한 번도 회의를 건너뛴 적이 없고, 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결사적으로 했다"고 얘기했다. 왜 그렇게 결사적이었는가.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성실하게 한다는 원칙이다. 제대로 할 수 없으면 안 하든가…. 여름 휴가 때는 회의를 생략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그렇게 된다. 독자 권익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니 더 욕심을 내 매달렸다."

김 위원장은 "언론 자유를 지키면서 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와 법원의 주요한 역할이자,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요즘은 언론이 너무 미지근해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 고객이 호텔 엘리베이터에 몇 시간 동안 갇혔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그 호텔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더라고요. 흉악범의 신원을 공개하는 문제도 그렇고요."

김용준 독자권익위원장은“하루에 2시간쯤 신문을 읽는다. 나는 여전히 신문에서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2002년 4월 독자권익위원장 취임 때 "조선일보 보도로 인한 피해 당사자 입장을 최대한 반영해 신속하고 적절한 피해구제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엔 기사 때문에 권익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자체 조사를 통해 해명 기사를 쓰는 일을 했다. 초창기엔 매달 한 건 정도 그런 게 있었는데, 조선일보가 기사를 잘 써서 그런지 차차 없어졌다. 크게 내세울 것은 없지만, 이런 게 독자권익위원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를 하루에 2시간씩 읽는다는데.

"아침 6시쯤 일어나면 신문부터 집어와서 읽기 시작한다. 침실 바닥에 엎드려서 신문을 읽는다. 아침 7시쯤 수영장에 가서 운동한 뒤 휴게실에서 다른 신문들을 몇 종 읽는다. 다 못 읽은 건 사무실에 가져와서 읽고, 저녁에 집에 와서 다시 읽었다."

―신문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여전히 신문을 통해 배우는 게 많다. 보도뿐 아니라 인터뷰나 책 리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운다. 책은 다 못 읽더라도 책 소개 기사는 꼭 읽어본다."

김 위원장은 책상 서랍에서 책 리뷰 기사를 오려둔 파일을 꺼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등 장하준 교수의 책은 거의 다 읽어봤어요. 90% 이상 공감이 가니까, 참 글을 잘 쓰는 분입니다."

―'선천성 소아마비'라는 표현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많이 했다.

"기자들이 잘 몰라서 그랬을 텐데…. 신문사 안에 장애인이 없으니 무지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잘 모르면, 그 분야를 알기 위해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잘못된 언론 보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있나.

"헌법재판소 소장으로 있을 때 군필자(軍畢者) 가산점 폐지를 결정한 적 있다. 당시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나 밥 먹고 부탁받아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소문이 있다고 월간지 기사에 난 적 있다. 그런 사실도 없고, 같이 밥도 먹은 적이 없는데. 언론은 사실에 근거해서 기사를 써야지, 풍문을 전달하는 식은 곤란하다. 입장을 바꿔서, 기사에 나오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조선일보 보도 가운데 기억에 남는 성공작을 꼽는다면.

"한국 사회가 갈 방향을 제시하고, 다양한 대안들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4.0'은 참 잘 만든 기획이다. 재벌이 자기보다 못한 기업을 배려하면 좋은데,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쪽박까지 깨는 경우가 많으니 참 큰일이다. "

―신문 보도에서 취약한 부분은 어디인가.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심층취재해서 소비자 입장에서 속 시원하게 풀어주면 좋겠다. 배추 파동은 왜 이렇게 자주 되풀이되고, 칠레 와인은 왜 현지보다 서너 배씩 비싼가. 유통업자들의 장난 때문인지, 혹시 이런 사태를 낳는 법규상의 허점은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서 살펴봤으면 한다. 이런 심층보도를 하려면 전문기자들이 필요하다.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의사 등 전문가들이 취재기자로 많이 뛰었으면 좋겠다."

―젊은 층은 신문을 읽지 않고,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조선일보가 재벌이나 기득권 세력을 편든다고 공격한다.

"난 조선일보가 젊은이들에게 쓴소리는 하지 않고 '아첨'하려고 하는 게 불만이다. 우리 때도 고학(苦學)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요즘 젊은이들만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반값 등록금'이니 해서 달콤한 얘기만 들려주려고 한다. 책도 안 읽고, 신문도 안 읽고 그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얻은 쪼가리 지식이 전부인 줄 아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따끔하게 실력을 키우라고 왜 얘기 못 하나. 공부를 잘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학비를 벌라고 해야지, 노력도 안 하는 대학생들에게 국민이 세금으로 등록금을 대신 내줘야 하나."

매달 둘째 주 월요일에 열리는 독자권익위원회.

―지난 10년간 대통령선거 2차례와 총선 2차례, 노 대통령 탄핵,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등 한국 사회를 첨예하게 갈라놓은 사건들이 많았다. 조선일보 보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런저런 불만들이야 있겠지만, 나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잘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노·사 문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진통을 겪는 숙제다.

"경영권을 자식들이 승계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산을 물려주는 건 보장해야 하지만, 기업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월급을 동결하거나 감원부터 하는데, 노동자들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오너들이 벌어놓은 것부터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전문 경영인들이 회사를 맡으면, 이런 요구를 하기는 어렵다. 대기업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경영 승계같은 부정적 측면을 좀 더 철저하게 감시하는 보도가 이어졌으면 한다."

김 위원장은 "연소득 8800만원(과표기준) 이상은 모두 비슷한 세율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은 세율을 좀 더 높이고, 세금을 전혀 안 내는 저소득층도 조금씩 세금을 내게 해서 세금을 쓰는 나랏일에 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산층만 쥐어짜는 세금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일부 법관들이 페이스북 등에 거친 말들을 올리면서 법관의 품위와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았다. 법관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법관은 건전한 양식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요즘 법관의 언행이 과연 건전한 양식을 갖췄는지 의심스럽다. 법관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사법권 독립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 법관 자신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그걸 오해하는 법관들이 있다. 법관은 국민들의 상식에 부합하는 재판을 해야 한다."

―법치가 확립된 사회가 선진 사회일 텐데, 법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많다.

"법을 우습게 아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덕치(德治)를 중요시하고 법치(法治)를 경시한 전통적 유교사상과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해방 이후 민주적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 영웅적 행동으로 비친 측면이 클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돈 있는 사람들이 법을 더 지키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법은 우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누구나 예외 없이 지키도록 해야지, 미운 사람만 법으로 단속하는 차별적 적용은 안 된다. '세종실록'에도 법은 만드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지키는 게 어렵다고 했다. 법은 상식적으로 만들어야지,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법(稅法)이나 선거법처럼 어렵고 복잡해서 제대로 지킬 수 없게 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세법을 100%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권력에 밉게 보이면 세무조사부터 하지 않는가."

김용준 독자권익보호위원장은

서울고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열아홉이던 1957년, 고등고시 9회 시험에서 최연소 수석합격했다. 서울가정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헌법재판소장 재임시, 군 가산점제, 동성동본 혼인금지, 과외금지, 영화사전검열을 위헌으로 결정해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법무법인 넥서스 고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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