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그 작품 그 도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_ 영덕

조선일보
  •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2.03.03 03:02

    드라마처럼… 세상 모든 것이 해피엔딩일 수 없을까?

    2011년 봄,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기던 날, 덩그러니 침대 하나만 들여놓은 작은 방에서 나는 핸드폰을 켜고 DMB로 지나간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주인이 없는지 이사한 작업실 옆방에선 개 짖는 소리가 왈왈왈 벽을 타고 울렸다.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아 핸드폰 안테나를 뽑아 이리저리 돌렸다. 새벽 1시 15분. 화면은 보이지 않고, 간간이 소리만 들리는 그 드라마에서 마침내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녀, 그토록 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지만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배우, 최진실이었다.

    너무 잘살았던 서울여자의 대척점에 강구항의 거친 바다를 끼고 살아온‘선장집’의 아들이 있다. 순탄할 리 없어 보였던 결혼생활이었지만, 둘은 사랑으로 갈등을 봉합한다. / 조선일보 DB

    그날 새벽 4시까지 핸드폰으로 나는 침대에 누워 '연속방송'이라고 적힌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를 보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 속에는 광고회사 사내커플이었던 박상원과 최진실이 부부로 나오고, 영덕에서 올라와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서울살이를 시작한 박상원의 가족들과 서울 토박이 최진실의 가족들이 있었다. 자라온 환경이나 가치관이 다른 신혼부부. 그리고 영덕에서 올라온 전직 선장인 시아버지와 여자 잘 만난 팔자 한 번 고쳐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날라리 시동생, 엄마를 찾아 방황하는 재수생 막내 시동생 등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었다. 무스를 잔뜩 발라넘긴 차인표의 헤어스타일은 드라마 속 배경이 2011년이 아니라 1997년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대 그리고 나'를 보았던 건 IMF 때였다. 사람들이 집안에 있던 금을 모아 팔고, 길을 걷다 보면 '쫄딱 망했습니다! 대박, 세일 90퍼센트!' '자장면 한 그릇 1000원'이라고 써놓은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막 독립해 스튜디오를 차린 선배는 그때, IMF의 직격탄을 맞고 스튜디오를 정리해야 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려던 나는 취직이 막막해 백수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이 나오던 1998년, 지금은 없어진 잡지 '인 서울 매거진'의 '백수의 힘'이란 우스꽝스런 제목의 대담에서 나는 취업준비생 'B'로 등장했었다.

    야심차게 준비하던 무엇인가가 실패로 끝났을 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남는다. 가령 촬영 스튜디오를 꾸미기 위해 들여놓았던 화분들, 메이크업 룸에 걸려 있던 커다란 거울, 장식용 벽돌 같은 것들 말이다. 버리기에도, 그렇다고 팔기에도 애매한 그런 것들 중 하나를 내 방에 들여놓았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인장이었는데, 방에 갖다놓은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선인장의 가시에 손톱 밑이 찔린 날, 대일밴드를 붙이고 이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를 봤었다.

    그때, 드라마의 배경인 영덕에 가고 싶었었다. 어촌에서 태어나 평생 거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선장으로 살아온 최불암이 서울로 내려와 죽은 생선들의 집합소, 노량진 수산시장의 잡부로 일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었다. 그때의 내 초라한 모습이, 이루지 못한 내 꿈이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새벽 노량진 시장의 생선좌판 사이를 빠르게 걷는 그의 모습 속에 겹쳐졌었다.

    훗날, 영덕의 '선장집'에 간 건 그래서였다. 식당 간판도, 일하는 사람도 따로 없는 집으로, 방에 들어가면 손님이 직접 상을 펴고 자리에 앉는 곳이었다. 따로 메뉴판도 없는 그곳에서 주인은 그날 배에서 잡아온 게를 쪘다. 살아있는 게의 딱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기절시키고, 차곡차곡 쌓아 찜통에 찌고 커다란 쟁반에 담아오면 각자 알아서 가위를 들고 요령껏 파먹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뭉툭 잘려나간 주인이 게를 담아오면 집 너머로 보이는 바다 냄새가 방 안까지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마을 전체에 젊은 사람이라곤 거의 없고, 걸어 다니는 길목마다 허리 굽은 노인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천천히 걷고 있는 스산한 풍경. 횟집들이 늘어선 활기차고 화려한 강구항과 달리 그곳은 항구에서 30분쯤 떨어져 훨씬 더 고요하고 스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덕게 하나 먹자고 나는 왜 이렇게 쓸쓸한 어촌 마을까지 내려왔을까. 내 마음속의 영덕은 부산이나 강릉과도 달랐고 그래서 더 애잔했다.

    너무 잘살았던 서울 여자와 너무 못살았던 시골 남자의 결혼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하지만 친정과 시댁의 갈등, 가족 사이의 반목을 주인공 수경과 동규는 사랑으로 해결하며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실제 이 드라마가 끝나고 대한민국은 기적처럼 IMF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다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 이후 카드대란과 금융위기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게 해피엔딩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십수 년이 지나, 이토록 밝고 긍정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지금은 없는 한 여배우의 비극적인 죽음과 손가락 하나가 잘린 선장 출신의 횟집 주인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어쩐지 쓸쓸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방을 타고 들려오는 주인 없이 우는 개의 울음소리 역시도.

    ●그대 그리고 나: 박상원, 최진실 주연의 드라마. 최고의 신인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차인표와 이본, 아이돌 스타였던 송승헌이 출연하였다. 1997년 10월 11일부터 1998년 4월 26일까지 MBC에서 방영되었으며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경이로운 시청률(마지막회: 66.9%)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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