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日軍이 벌벌 떤 '백마 탄 장군' 육필일기 나왔다

조선일보
입력 2012.03.01 03:04 | 수정 2012.03.02 03:41

항일운동가 김경천 장군 육필일기 '경천아일록' 출간
구한말, 일본 간 정부유학생 육사졸업후 엘리트 기마장교로
3·1운동 후 日장교직 버리고 지청천 장군과 함께 中 망명
항일 무장세력 지휘, 소련 당국에 무장해제 당해 소련 수용소서 노역중 순국

구한말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졸업, 일본 육군 기병중위로 일하다 3·1운동으로 만주 망명, 연해주 독립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후 소련에서 간첩으로 몰려 강제수용소에서 사망….

항일운동가 김경천(金擎天·1888~1942) 장군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이도 드물 것이다. '만주의 김일성 장군' 신화 주인공의 하나로도 알려진 김경천 장군이 1920년대 전후 망명과 항일 투쟁을 기록한 육필 회고록 및 일기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3월 1일 출간된다. 나라 잃은 군인의 비통한 심정과 독립운동 일선의 실상을 담은 고백록이다.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하루는 동경 근교에서 대항연습을 하노라니 이등박문 암살이라는 호외가 나돌며 동경시가 부서지게 떠든다. 나는 가슴이 덜렁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1909년 10월)

일본 육군 유년학교를 갓 졸업한 스물한 살 김경천의 감격 어린 속내다. 김경천은 육군 유년학교 시절에도 일본인에게 깔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6백수십명의 일본 학도가 처음으로 약소국 사람인 내가 입학한 것을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함부로 아니하고 코웃음은 고사하고 그들한테 행동으로도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

1910년 12월 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엔 자신의 얄궂은 운명을 이렇게 썼다. "실로 기이하다. 나는 광무제 시기에 주일(駐日) 대한제국유학생이더니 오늘은 일본 장교가 되었다. 아아, 나의 앞길은 이다지도 변화가 많은 것일까."

1911년 일본 육군 기병장교 시절의 김경천 장군(위)과 1939년 소련에서 간첩죄로 체포된 직후의 초췌한 모습(오른쪽 아래). 김장군 왼쪽은 아내 유정화다. 왼쪽 아래 사진은 1921년 3월 연해주 빨치산 활동가 모임으로 김 장군이 맨 뒷줄 왼쪽에서 셋째에 서있다. 당시 연해주 포시예트₩훈춘 한인 빨치산 총사령관이었으나 공산당원이 아닌 탓에 뒷줄에 섰다. /고려인 역사 연구자 최아리따, 김경천 장군 외손자 김예브게니 제공
1911년 일본 육군 기병장교 시절의 김경천 장군(위)과 1939년 소련에서 간첩죄로 체포된 직후의 초췌한 모습(오른쪽 아래). 김장군 왼쪽은 아내 유정화다. 왼쪽 아래 사진은 1921년 3월 연해주 빨치산 활동가 모임으로 김 장군이 맨 뒷줄 왼쪽에서 셋째에 서있다. 당시 연해주 포시예트₩훈춘 한인 빨치산 총사령관이었으나 공산당원이 아닌 탓에 뒷줄에 섰다. /고려인 역사 연구자 최아리따, 김경천 장군 외손자 김예브게니 제공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권한다"

김경천은 1919년 1월 휴가를 청해 경성에 왔다가 3·1운동을 맞았다. "동대문 안 부인병원 앞으로 청년단이 가서 만세를 부르니 그 간호부들이 모두 울면서 만세로 응답함은 나의 마음을 더욱 분하게 한다.… 청년회관에 있을 때에도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1919년 3월 1일)

김경천은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당시 그는 아내와 세 딸이 있는 서른한 살 가장이었다. 그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 일본 육사 동창이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지청천(1888~1957) 장군이다.


김경천은 당시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내다본 지식인이었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나의 망명이 좀 이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이가 젊고 기개와 용기가 있으므로 해외에서 여러 해를 표류하며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장군은 1920년대 초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중국 마적, 러시아 백군과 싸웠다. '백마를 탄 김 장군' 신화가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1921년 3월 1일자 일기에선 진전 없는 독립운동을 스스로 비판한다. "너무도 실제 방면에 노력하는 자가 적고 허명에 취한 자가 많다. 상해임시정부에 벼슬을 구하러 가는 것을 보아도 알고 거기 당사자들이 세력 다툼하는 것을 보아도 알며…."

◇"군대 전부가 걸인 같다"

독립군의 생활은 비참했다. "식료, 의복, 비용은 전적으로 부족하여 군대 전부가 실로 걸인 같다."(1921년 10월 11일) 1922년 여름, 김경천이 이끌던 독립군을 포함한 러시아 영내 한인 무장 세력은 소련 당국에 무장해제당했다. 항일 무장 운동이 좌절된 후, 김경천 장군은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기 직전인 1936년 가을, 정치범으로 체포돼 2년 반을 복역했다.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간첩죄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소련 북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1942년 숨졌다.

'경천아일록'을 정리한 전 고려일보 기자 김병학씨는 "김경천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등 소련식 공산주의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게 박해를 당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고 했다. '경천아일록'은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학술자료총서 첫 권으로 출간된다.

☞ 김경천 장군

함경남도 북청 출생. 일본군 기병중위로 있던 1919년 망명,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장군과 함께 1920년대 만주·연해주 무장 항일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박환 수원대 교수)로 평가받는다.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바로잡습니다
▲1일자 A11면 "日軍이 벌벌 떤 '백마 탄 장군' 육필일기 나왔다" 기사에서 김경천 장군의 출생지 '함경북도 북청'은 '함경남도 북청'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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