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복원 전문가 김주삼(52)은 서울 평창동의 한 주택을 임차해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30여평 크기 공방(工房)은 흰색으로 벽이 칠해져 있었고, 한가운데 작업대 위에는 한쪽 변이 2m에 가까운 거의 200호 크기 작품 두 점이 나란히 뉘여 있었다. 그는 '루페'라고 불리는 작업용 돋보기와 작업복을 걸치고 전기인두(수바툴라)로 작품 뒤편의 접착제를 조금씩 녹여내고 있었다. 종이와 천을 잇대어 붙인 작품은 표면 곳곳이 울어 있었다. 작업 속도는 느렸고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수억 원대 작품이었다. 3명의 직원들은 말없이 그를 지켜봤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공간의 밀도와 긴장감이 높아졌다. 가끔씩 숨소리만 들렸다.

이곳은 훼손된 미술품을 고치는 '종합병원' 같은 곳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김주삼은 1987년 졸업 후 무작정 파리로 날아가 파리1대학 미술품보존복원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든 분야에서 4년을 배웠고 다시 현지 공방에서의 인턴 생활이 이어졌다. 7년의 유학 생활이 끝난 뒤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호암미술관에 입사해 14년간 일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Art C&R)'를 열었다. 2001년에 나온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도 그와 같은 직업이었다. 주인공은 "미술품 복원사는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직업이야"라고 말했다. 실제 그 말처럼 그를 만나던 날 이곳 공방에서는 곰팡이가 피어 알아보기도 힘든 마티스의 초기 드로잉, 누군가 커피를 엎지른 국내 유명 작가의 대형 회화 작품, 캔버스가 찢어진 그림 등 자칫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을 작품들이 새 생명을 얻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직업

―프랑스에서 배웠다고 했는데 공방 생활도 했나?

"4년 걸려 석사를 마쳤다. 논문을 쓰려면 공방이나 박물관에서 인턴십을 쌓아야 했다. 나는 공방을 선택했다. 공방은 박물관보다 작품 순환이 빠르고,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면 유명 작품을 만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접해 본 것 중 유명 작가의 작품은?

"루오의 작품이 기억이 난다. 종이에 그린 유화작품이 많았다. 호암미술관 복원실에 근무하던 시절인 99년 프랑스문화원 지원으로 퐁피두에서 2개월 반 동안 기술연수를 하기도 했다. 당시 마티스의 콜라주,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피카소의 200호짜리 '여인추상', 샤갈, 폴 클레 등의 작품을 2개월 동안 100점도 넘게 봤고 복원 작업에도 참여했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수억원이 넘는 작품이나 무명 화가의 그림이나 그에겐 똑같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관심은 다치고 상처입은 작품을 살려내는 것일 뿐. 지난 21일 오후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서 김주삼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장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작품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일에 집중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미술작품은 일반 감상자들에게 시각(視覺)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반면 복원 전문가는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 같다.

"미술품 애호가들이 보기에 '특권'일 수도 있다. 반 고흐나 세잔의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웃음)

―미술품 복원가는 예술가와 장인의 중간쯤 어디에 있다고 보나.

"예술가는 아니다. 장인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이곳 공방을 봐라, 온갖 화학약품과 접착제, 붓, 망치, 끌, 드릴, 톱 같은 것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자부심을 갖는 작품은 뭐가 있나?

"남들이 포기한 작품을 살려낼 때 성취감이 크다. 가장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 작품 중에 이인성의 '복숭아'가 있다. 워낙 난도가 높고 많이 상해 있던 것을 큰 수술을 해서 복원했다."

―복원 공정은 복잡한가.

"작품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클리닝, 접합, 메움, 색맞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의 복원 공정은 약간 실수를 해도 다시 작업 이전 상태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클리닝은 잘못하면 작품도 함께 지워지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크다. 손을 대기 전 시나리오를 먼저 만들고 수십 수백번 머릿속으로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일단 시작하면 한 번에 끝낸다. 자꾸 시행착오를 겪으면 작품만 망가진다."

―작품을 고쳐서 내보낼 때 아쉬움은 없나.

"없다. 내 것이 아니지 않나. 가끔 전시회에서 내가 처리한 작품들과 조우하면 무감각하거나 낯설다."

―미술 작품을 수집하지는 않나.

"늘 작품이 근처에 있기 때문인지 작품을 소유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가끔 밤에 혼자 작업실에 있다 보면 개인 화랑을 갖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상처가 나지 않았으면 나한테 오지도 않을 작품들이지만…."

―작업 중 큰 실수를 한 적은 없나.

"유학 시절 접착제를 흘려서 그림이 작업대에 붙어버린 적이 있다. 신기한 것은 나이가 들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고를 내지 않게 되더라.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나이 들어 가면서 하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가장 떨리는 순간은 언제였나

"피카소의 200호 크기 작품을 다뤘을 때 정말 떨렸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상상되는 것처럼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니 실수를 할 것 같은 느낌이 커졌다. 고가 작품이든 저가 작품이든 너무 긴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마치 죽은 작가의 영혼이 나를 빌려 작업을 하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실제 그런 느낌이 드나.

"그건 문학적인 감정과잉인 것 같다. 복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정신을 눈앞의 '마테리얼'에만 집중한다. 반 고흐의 작품이라고 하면 큐레이터나 평론가들은 형상이 어떻고 아우라가 어떻고 하지만, 우리는 망가진 부분에만 집중한다. 작품에 빠지면 작업에 집중하기 힘들다. 그때 떨리는 것이다. 의사들도 수술실에서는 환자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화학도, 프랑스로 떠나다
대학시절 미술반에서 살았죠… 전공 살리고 그림도 보고싶고…
복원가, 딱 내 길이라 생각했다

名畵 치료하는 의사
곰팡이 피고, 커피 엎지르고… 죽어가는 수억원짜리 작품들
붓·망치·접착제로 생명 불어넣어

난, 아티스트가 아니라 匠人
값 매길 수 없는 피카소 '여인추상' 만지는데 손이 덜덜 떨려…
외과의사 같은 냉정함이 필수다

미술에 빠진 화학도

―어떻게 낯선 이 분야의 일을 하게 됐나.

"대학 시절 화학과 학생 주제에 미술반에서 살다시피 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 '계간미술'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유명 그림들이 국내에 복원가가 없어 일본에 복원을 의뢰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막연하게 내 화학 지식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는 무작정 프랑스로 떠났다."

―과거 국내에는 복원가가 없었나.

"주먹구구식이 많았다. 인물화의 얼굴이 동전 크기 만큼 손상이 됐는데 이걸 대충 칠하다 얼굴 전체를 새로 칠해놓은 것까지 봤다. 사실 한동안은 복원하면서 망친 작품을 다시 고치는 일도 많이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미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작업한 것 아닌가.

"미술품 복원은 문화유산을 대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감과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테크닉만 배워서는 안 된다. 미술사를 비롯해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배운 것을 다 활용하고 있나.

"현대 미술은 노화가 빠르다. 내가 공부한 옛날 작품들은 망가져도 대충 치료법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현대 미술은 5배는 더 어렵다. 작가들 테크닉이 다양하고 별 희한한 재료를 사용한다. 그래서 단순히 작품을 살린다기보다 작가가 원하는 개념,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잘 살려주느냐까지 신경을 쓰게 된다."

―현대 미술은 왜 노화가 더 빠른가.

"옛날 작가들은 '보존성'을 생각하면서 재료를 선택했다. 접착제 하나를 써도 오래 보존하기 위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현대미술로 들어오면서 창의성만 추구하다 보니 아무것이나 갖다 쓰고 그러면서 효과만 따지게 된다. 복원가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

―프랑스에선 미술 전공자들이 주로 이 일을 하나.

"아니다. 내가 있던 파리 1대학 석사 과정에 23명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이과출신이 5명이었다. 그리고 미술사 전공자 1명, 나머지의 절반은 고고학 전공자나 사설학원에서 보존복원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는 미술품 복원 전문가지만, 이과 출신답게 박수근 이중섭 등 국내 유명 화가의 표현 기법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논문을 쓰기 위해 X선 촬영, 재료 샘플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화가의 작품을 놓고 진위 논쟁이 벌어질 때면 단골손님처럼 여기저기 불려다니기도 했다. 아무 데나 복원이라는 말을 붙이고, '오리지널'에 대해 엄격하지 못한 우리 문화계의 풍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예술품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고도 했다.

복원이냐 재건이냐

―박수근의 '빨래터' 진위 논쟁이 붙었을 때 감정 작업에 참여했다.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은 어떻게 그렸는지 직접 재연도 해보고, 박수근은 어떤 기법을 썼길래 그런 감동과 아우라를 주는지 그 비밀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연구도 해봤다. 그런 이력 때문에 간혹 진위 논쟁에 참여하게 됐다."

―어느 잡지에서인가 보존과 복원, 재건을 구분해서 쓰자는 주장을 했더라.

"복원이라는 말은 '원본을 되살린다'는 뜻인데 우리는 함부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남대문(숭례문)이 홀라당 다 탔는데 그걸 완전히 새로 만들어 놓고 '복원'이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그건 복원이 아니라 '재건(再建)'이다. 그만큼 오리지널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대문을 왜 굳이 이명박 대통령 퇴임 전에 완공을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다."

―황당한 일도 많이 봤겠다.

"수억원대 작품인데 때가 묻은 것을 지우개로 벅벅 지워 놓은 것도 봤고, 한국화 4대가의 병풍에 꼬마가 연필로 배를 그려놓은 것도 봤다. 유럽에서도 마티스의 작품에 아이들이 볼펜으로 낙서한 것이 종종 들어왔다. 수억원짜리 작품을 10만원짜리 액자에 넣어 둘 정도로 작품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이들도 많다."

―모든 작품이 복원 가능한가.

"훼손된 현재 상태보다 나아질 수는 있지만, 오리지널과 똑같이 되지는 않는다. 복원이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복원은 오래되어 역사성까지 포함된 개념이다. '최후의 만찬'도 X선 촬영을 해보면 수많은 복원 과정을 거친 것이 보인다."

―자기 작품이 복원 작업을 거친 사실을 숨기는 소장자도 있겠다.

"전문가들이 보면 안다. 또 웬만한 작품은 매매를 하려면 작품 이력서인 '컨디션 리포트'가 따라다닌다. 원하지 않는 컬렉터도 있지만, 우리가 보관한다. 모든 작업 과정은 단계별로 사진도 찍고 기록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