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폭력배 척결에 손발을 맞췄던 일등 공신 측근의 미국 영사관 은신, 그를 붙잡기 위해 보낸 무장 경찰 병력의 미 영사관 포위, 중앙 정부 정보기관(국가안전부)의 개입….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왕리쥔(王立軍·53) 전 충칭(重慶)시 공안국장 사건으로 '중국 정계의 록스타'로 불려온 보시라이(薄熙來·63) 충칭시 서기의 정치 생명이 '시한부' 상황으로 내몰렸다.

홍콩 명보(明報)는 14일 소식통을 인용, "공산당 중앙이 이번 사건을 단순한 개인 비리 사건이 아니라 '극도로 엄중한 정치 문제'로 보고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왕 전 국장의 개인 비리를 넘어, 국기(國基)를 뒤흔든 사건으로 보고 조사 중이라는 것이다.

왕 전 국장은 보 서기가 이달 초 그를 공안국장에서 해임하자 자신에 대한 비리 혐의 조사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지난 6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했다. 왕 전 국장은 그가 제보한 보 서기의 비위 혐의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조사하겠다는 국가안전부의 약속을 받고 7일 영사관을 나와 베이징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보 서기가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서기처럼 형사 처벌까지 받지는 않겠지만,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오는 10월 18차 당대회에서 차기 최고지도부(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려는 그의 정치적 꿈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상하이방 출신인 천 전 서기는 지난 2006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경제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공금 유용 등의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번 사건은 외견상 공청단파가 반대 세력인 상하이방·태자당 연합세력을 견제하는 권력 투쟁으로 비쳤다. 차기 최고지도부 선출을 앞두고, 후진타오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파가 태자당의 유력 상무위원 후보인 보 서기 제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권력층이 보 서기를 차기 리더 후보에서 배제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더 우세하다. 절제와 과묵, 서열, 막후 타협 등을 중시하는 중국 정치 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대중 정치를 구사해온 보 서기는 자신이 속한 정파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은 이번 사건에서 보 서기의 몰락을 사실상 방조했다. 1년여 전부터 왕 전 국장의 비리를 조사해온 당 중앙기율검사위는 태자당 계열의 허궈창(賀國强) 상무위원이 관장하고 있다. 충칭시 공안이 왕리쥔의 신병을 확보해 이번 사건을 자체 봉합하지 못하도록 막은 국가안전부 역시 같은 계열의 저우용캉(周永康) 상무위원 산하이다.

베이징 정가의 한 분석가는 "서로 다른 출신 배경과 경력, 노선의 차이에 따라 대립하면서도 막후 타협을 통해 분열은 피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 내 파벌 정치"라면서 "최고위층이 보 서기가 당 내에 극단적인 갈등을 불러올 것을 우려한 것 같다"고 말했다.

보 서기는 중국 공산당 원로인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아들로 다롄(大連)시장과 중앙정부 상무부장(장관)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한때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언론을 상대로 한 대담한 발언과 서열을 뛰어넘는 튀는 행태로 당 고위층의 눈 밖에 났고, 2007년에는 서부 변방의 충칭시 서기로 밀려났다. 충칭시 부임 이후 이 지역 폭력조직과 정부 내 비호세력을 소탕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모아 중앙 무대 재진출을 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