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린 작년 연말 어느 날, 대검의 한 검사가 서울 시내 한 전직 검찰총장 집을 찾았다.
검사는 어깨 넓이보다 조금 큰 초상화 액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눈길에 미끄러져 액자가 상할까 종종걸음을 쳤다. 전직 총장댁 거실에서 검사는 액자를 싼 보자기를 풀었다. "총장님, 초상화가 마음에 드십니까."
"어이 ○ 검사, 내가 눈이 어두워서…. 그거 들고 저쪽으로 가서 서봐. 아니, 조금 더 앞으로…."
그날 전직 총장은 초상화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약간 수정해 달라고 했다. 검사는 지적받은 부분을 보완한 초상화를 다시 들고 가 '앞으로' '뒤로'를 몇 번 더 반복해야 했다.
대검찰청 15층 강당에 걸려 있던 역대 총장 사진이 조만간 유화(油畵) 초상화로 전부 바뀐다. 작년 7월 퇴임한 김준규 전 총장이 퇴임 전에 "사진이 모두 영정 사진 같으니 미국식으로 초상화로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그렇게 됐다.
'초상화 프로젝트'에는 대검의 한 과(課), 검사 여러 명이 징발됐다. 이미 작고한 총장의 유가족에게 허락을 받는 일부터, 유명 초상화가를 섭외하고,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전직 총장들에게 선뵈고 '주문 사항'을 반영해 최종 OK를 받는 데까지 장장 7개월여가 걸렸다.
이 프로젝트 자체를 탐탁지 않아하면서 '꼭 이렇게 해야 하느냐'는 전직 총장도 있었지만, 어떤 총장은 "인상이 너무 강하지 않으냐" "이 부분은 내 실제 얼굴이랑 다른데…" 하며 초상화를 3번씩 수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대검은 이달 말쯤 역대 총장을 초청해 '초상화 제막식' 행사를 가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행사를 외부에 공개할지에 대해선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다고 한다. 김 전 총장이 '초상화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을 때부터 "그런 데다 국가 예산을?" 하는 곱지 않은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선 검사 가운데 '초상화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검사는 그리 많지 않다. 아는 검사들은 화제 삼는 것 자체를 꺼리는 편이다. 한 검사는 "전 총장 때 이미 한참 진행을 시켰는데, 중간에 하다가 말 수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한국에서 퇴임 후 초상화를 남기는 직책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府) 요인이다. '초상화 분야'에선 조만간 검찰총장이 그 반열에 오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