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에 '누에고치 박스집' 선물한 대학생들

조선일보
  • 이재준 기자
    입력 2012.02.11 03:05

    건축학 전공 사회공헌모임 '비 온 대지' 9개월에 걸쳐 개발
    "누에고치서 나비가 나오듯 노숙인도 이 집에서 살다가 다시 사회인으로 거듭나길"
    "장기적으로 자립할 길 마련을"

    "노숙인들이 지저분한 종이 박스에서 자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이 박스는 신기하네요. 깔끔하고."

    10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지하보도를 지나던 유모(27)씨는 처음 보는 누에고치 모양의 '박스집'앞에서 멈췄다. 일본인 관광객 유키(여·30)씨는 "이런 것은 처음 본다"면서 사진도 찍었다.

    이 박스집은 대학연합건축학회 소속 사회 공헌 소모임 '비 온 대지'에서 만들었다. 신상은(24·한양대 건축학과)씨 등 건축 전공 대학생들인 회원 10여명이 지난해 5월부터 개발을 시작해 지난 4일 1차로 15개를 서울 을지로입구역 부근과 시청역 등의 노숙인들에게 나눠줬다. 1개당 7500원이 들고 제작 시간은 10여명이 달라붙으면 15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비 온 대지'는 비 온 뒤 대지에 새싹이 자라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에고치 모양의 독특한 디자인은 신씨가 건축학 수업 시간에 배운 '절판(折板)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절판구조'란 종이를 여러 차례 접으면 유리컵을 지탱할 만큼 강한 구조를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신씨는 "노숙인들이 자는 박스의 재료가 종이여서 절판 구조를 반영하면 더 단단한 박스집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서울시 중구 태평로의 한 지하보도에서 노숙인이 누에고치 모양의 종이박스집을 설치하고 있다. 이 박스집은 접어서 휴대할 수도 있다(작은 사진).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박스집엔 건축 원리뿐 아니라 '비 온 대지' 회원들의 바람도 담겨 있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3학년 김지희(21)씨는"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듯 노숙인들이 이 박스집에서 살다가 다시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씨 등은 박스집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해 5월 노숙인의 잠자리에 대한 현장 조사를 했다. 설문지를 노숙인들에게 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노숙인들에게 50문항의 설문지는 무리였다. 이들은 방법을 바꿨다. 지난해 6월 노숙인들을 5일 동안 무작정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매일 1명씩 정해서 아침 8시부터 잠드는 저녁 8시 정도까지 약 12시간을 노숙인 관찰에 보냈다.

    신씨는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도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박스집은 이런 연구의 결과다. 노숙인들이 접어서 휴대하고 다닐 수도 있다. 박스집을 이용하는 노숙인 김모(50)씨는 "바람이 완전히 막혀 들어오지 않아서 따뜻하다"며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 눈길도 의식하지 않게 돼 좋다"고 말했다.

    '비 온 대지'는 11일 5개를 서울역에서 배부하는 등 7주간 35개를 무료로 나눠줄 계획이다. 이후엔 인터넷 홈페이지(www.beondegi.org)를 통해 개인 기부를 받는 대로 박스집을 더 만들어 나눠줄 예정이다. 한 노숙인 구호 단체 회원은 "누에고치집 처럼 노숙인들을 당장 돕는 일과 함께 장기적으로 그들이 노숙에서 벗어나 자립할 길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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