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결 거부한 의식의 흐름… 그녀에겐 미학적 개성이 넘쳐

조선일보
  • 어수웅 기자
    입력 2012.02.06 03:04

    한유주 세 번째 소설집 '나의 왼손은 왕…' 펴내
    베케트·이인성이 문학적 혈연 "부디 20쪽만 참고 읽어달라… 그다음부턴 좀 쉬워집니다"

    지난달 23일, 설날 차례를 오전 10시에 지낸 소설가 한유주(30)의 가족 넷은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야행성 유전자를 지닌 그의 가족이 설날이라는 이유로 너무 무리했기 때문이다. 10시 차례도 이른 시각은 아니지만, 설날 대낮 온 가족 취침도 흔한 일은 아닐 듯. 예외를 제외하고, 보통 이 작가의 수면 패턴은 새벽 6시 취침에 낮 12시 기상이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 출간)는 지난 3년간 야행의 기록. 데뷔작 '달로'로 문학과사회 신인상(2003)을 받을 때부터 이미 익숙한 이야기지만, '일가족 야행'은 명함도 못 내밀 희귀한 문학적 유전자요, 동 세대에서는 독보적인 미학적 개성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는 법.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로 한유주는 구별될 것이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한유주 문학은 기승전결로 대표되는 이야기를 거부한다. 아니, 서사는 작가의 관심 자체가 아니다. 차라리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혹은 이야기가 맨 처음 태어날 때의 마음속 파동, 혹은 그 이미지의 구현이라고 해야 할까. 우선 이 비범한 제목부터.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가 제목이다. 오른손은 그저 거들 뿐이 아니라, 왼손을 베낄 뿐이다. 작가는 첫 단편 '나는 필경…'부터 끊임없이 중얼대고, 반복하며, 사건의 흐름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믿는 독자에게, 한유주를 추천하기란 미안한 일이다. 그의 욕심은 이야기의 원형이 아니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에 있으니까. 비유하자면 시각보다는 촉각에 의존하는 예술가도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앞이 안 보이면 모든 게 불가능한 독자도 있겠지만,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감각이 훨씬 더 발달한 독자라면 한유주의 단편들은 예민한 충격이 된다.

    멀리는 사뮤엘 베케트(Beckett), 가깝게는 이인성이 그의 문학적 혈연이다. 그렇게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뜻이다. 불친절한 작가라는 비판에 그는 "부디 20쪽만 꾹 참고 읽어달라"며 웃었다. 그다음부터는 좀 쉬워질 것이라면서. 그러고는 "의미는 담겨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찾아내고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학적이고 전위적인 작품과 달리 개인 한유주는 허술하고 빈틈 많은 캐릭터다. 홍익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이 산이 아니구나"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다음에는 책과 더불어 살겠다는 소박한 욕망으로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에 편입해 졸업했지만, 대학 도서관 사서 경쟁률이 수천 대 1이라는 사실에 뒤늦게 좌절한다.

    그는 선배 작가 오정희를 베끼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어쩌면 스타일로는 반대쪽 극점에 있는 작가니까. 그는 "내용이나 문체를 따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읽으면 칼처럼 '날카롭다'는 느낌이 드는 그 느낌을 베끼고 싶다"고 좁혀 말했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태도와 자세에 관한 얘기였다. 비유하자면 >김연아가 아이스링크를 대하는 태도, 박태환이 풀(pool)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오정희가 문장을 대하는 그 태도를. '필경사 한유주'가 문학에 대처하는 2012년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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