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 평창동에서 미술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하 2층, 지상 3층의 작업실엔 요즘 네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설치미술가 서상익, 사진가 원성원, 미디어 아티스트 양아치, 그리고 올해 일흔한 살 되신 제 어머니입니다.
2006년 구입한 그 집엔 원래 부모님이 사셨습니다. 그런데 2007년 8월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 혼자 계시기엔 그 집이 지나치게 넓고 적적해 보였습니다. "빈방을 젊은 작가들 작업 공간으로 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어머니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시더군요. 차고를 개조하고 2층과 3층 방을 작업실로 꾸몄습니다. 2010년 7월 30일 '오픈식'을 하고 작가들이 입주했어요. 서상익 작가는 차고 작업실을, 원성원 작가는 2층 방을, 양아치 작가는 3층 방을 차지했지요. 어머니는 "젊은 예술가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기니 배우는 게 많아 좋다"고 하시고, 작가들은 작업 공간을 얻어서 좋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인 셈이지요.
제 본업은 '증권맨'입니다. 하나대투증권 상무이면서 청담금융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지요. 재작년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하지원의 연적(戀敵)인 CF 감독 역을 맡았던 김사랑의 스튜디오를 기억하십니까? 레드, 화이트, 블랙 중심의 파격적인 인테리어로 눈길을 끌었던 그 스튜디오 장면은 사실 제 사무실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드라마에 나왔던 그 사무실에서 저는 아침 8시부터 장(場)이 끝나는 오후 3시까지 주식을 매매하고 고객 자산을 관리합니다. 딱딱한 숫자 놀음이 이루어지는 금융센터가 고급 호텔 바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제가 미술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8년 무렵부터입니다. 처음엔 컬렉터로 시작했어요. 초보 컬렉터 모임에 가입해 한 달에 20만원씩 '작품값'으로 곗돈을 부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탄 곗돈 750만원으로 2009년 박경리의 '토지(土地)' 초판본을 일일이 해체해 재구성한 이지현 작가의 작품을 산 것이 첫 컬렉션이었습니다. 이후 고영훈, 배병우, 이동기 등 한국 작가 작품을 한 점, 두 점 구입하기 시작, 30여 점을 보유하게 되었죠.
평창동 집 1층 계단 입구엔 돌과 책을 그린 고영훈의 그림을 걸었습니다. 업무상 자주 드나들던 한 호텔 로비 벽면에 걸려 있던 고영훈 작가의 그림을 미술을 알기 전부터 짝사랑하듯 좋아했답니다. 거실 소파 위에는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을 걸었지요. 말기암 투병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아, 여기엔 배병우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묵화(墨畵) 같은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버지 유언을 이루었다' 싶어 마음이 애틋하면서도 뿌듯합니다. 작품을 모으다 보니 어느새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2010년 3월 큐레이터 4명, 후원자 4명을 모아 작가 후원 프로그램 '프로젝트 808'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레지던시 운영에 뛰어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집안이 어려워졌습니다. 장남에 장손이라 '어떻게든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한화증권에서 영업을 시작하면서 증권맨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지요. 집요한 성격이 이 일에 잘 맞았어요. 2000년엔 업계 최연소 지점장으로 하나증권 명동지점장이 되었고, 2008년엔 하나증권 이사를 맡으며 청담금융센터를 개설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제 본업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고객에게 숫자나 수익률만 가지고 접근한다면 다른 금융기관과 차별성이 없으니까요. 센터를 문화적으로 꾸미고, 고객에게 작가와 이야기할 기회도 주고, 각종 문화 행사 때마다 초대도 했더니 의외로 투자자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평창동 집 지하에 작가들을 위한 프리젠테이션 공간을 꾸미고 해외 미술계 관계자들이 올 때마다 초대해 토론도 하고 이야기도 나눕니다. 작업 공간 제공뿐 아니라 해외 매니지먼트를 겸하고 있는 것이 우리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특징이랄까요.
증권업은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따릅니다.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긴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제게는 미술이 그 역할을 합니다. 주말마다 평창동 집에 들러 작가들 작업을 지켜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쁩니다. 은퇴하고 나면 전문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해볼까도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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