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호 논설위원

한나라당이 발표한 새 정강 정책엔 "성장과 복지, 시장과 정부, 자유와 평등, 효율과 형평, 환경과 개발의 조화를 추구하고, 이념·지역·세대·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는 국민통합적 접근 방법을 모색한다"는 대목이 있다. 새 정강 정책을 만든 이들은 이 문장에 담긴 '조화'와 '국민통합'의 두 단어가 당의 새 목적지로 정한 '국민행복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실천규범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먼저 떠오른 게 한나라당의 얼굴들이다.

현 대통령 고향은 경북 포항이다. 대통령의 정치멘토로 불려온 대통령 형 친구도 동향(同鄕)이다. 대통령과 맞서오다 지금은 'MB 이후 한나라당'을 양 어깨에 짊어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지역구는 대구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를 놓고 박 위원장을 뒤쫓으며 경쟁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경북 영천, 친박(親朴)으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이재오 의원은 경북 영양 출신이다. 여당에서 TK와 다른 동네 사람으로 대권을 입에 올리는 이는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이고 본인은 울산에서 정치를 한 정몽준 의원 한 사람뿐이다.

정치 관련 글을 쓰면서 웬만하면 출신 지역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왔다. 민감하니 피해가자는 뜻에서가 아니다. 지역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목줄을 움켜쥔 상수(常數)다. 이 끊어질 줄 모르는 동아줄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달라지는 변수(變數)들을 쫓아다니는 게 그나마 한 줄이라도 다른 글을 쓸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구(舊)주류와 신주류, 신주류에 맞서는 또 다른 비주류가 모조리 한 동네 출신이다. 이 말은 이젠 한나라당에서 한국 정치를 쥐고 흔드는 지역 문제에 관한 한 별다른 변수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한나라당이 늘 이랬던 건 아니다. 14대 대선 경선에선 경남 출신(김영삼)과 서울 출신(이종찬)이 맞붙었고, 15대 대선 경선 1·2·3위는 충청(이회창·이인제)과 경기(이한동) 출신이다.

지난해 전남 순천 보궐선거에서 '최루탄 의원'에게 나가떨어졌던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이런 말을 하고 다닌다. "박준영 전남지사가 김두관 경남지사에 비해 떨어지는 게 뭐가 있는가. 벌써 도지사 3선인데도 초선의 경남지사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또 (김대중 청와대에서 일한) 박주선 의원이 (노무현 청와대에서 일한) 문재인 변호사보다 뭐가 모자라는가." 그는 야권에서 능력과 경력은 비슷한데도 부산·경남 출신은 곧바로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고, 호남 출신은 찬밥신세인 건 또 다른 지역주의라고 목청을 높인다.

지역 문제는 이처럼 야당에서도 언제 깨질지 모를 유리잔 같은 존재다. 툭하면 야당 이름 앞에 '통합'이란 두 글자가 붙었다 떨어졌다를 되풀이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도 올 들어 지금까지의 처지는 불안하나마 이웃 간 동거(同居)에 들어간 야당보다 동거 상대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더 답답해 보인다.

지역만이 아니다. 얼마 전 경선에서 뽑힌 민주통합당 지도부의 출신 대학은 이화여대(한명숙), 서강대(문성근), 경희대(박영선), 단국대(박지원), 고려대(이인영), 서울대(김부겸)로 다 다르다. 한나라당 비대위 외부인사 6명 중 4명은 미국 대학을 나왔고(하버드대 2명), 이중 3명은 미국 대학 박사다. 좌장인 김종인 비대위원은 독일 박사다. 서강대를 나온 박근혜 위원장을 제외한 4명의 당내 인사 중 3명은 서울대(법대가 2명), 나머지 1명은 고대 법대를 나왔다.

보통의 경우 우수한 두뇌가 모인 조직은 뛰어난 성과를 올린다. 하지만 국민 전체를 아우르고 좌와 우, 위아래 모든 이의 처지를 두루 살펴야 하는 정당은 경우가 다르다. 한동네 사람만 모여 있으면 다른 동네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듯 엘리트만 몰려있는 조직은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처지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

미국 보수파를 대변하는 공화당은 지난 열한 차례 대선에서 일곱 번 이겼다. 보수가 지킬 것 많은 기득권층만을 위한 가치였으면 나올 수 없는 승률이다.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를 찍은 비율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를 나가는 백인 중에선 79%에 달한 반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 중에선 33%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연 수입 10만달러 이상인 고소득자 중 공화당을 찍은 이는 54%였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교회로 상징되는 사회적 '가치'가 수입이 말해주는 '계급'보다 훨씬 강력한 변수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건전한 보수는 지역을 아우르고, 계층을 넘어서고, 학벌을 뛰어넘는다. 건전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따뜻한 정신 없이 경쟁과 효율만 강조하는 사회는 점령시위로 넘쳐날 수밖에 없는 시대다. '조화'와 '통합' 두 마디를 새 나침반으로 삼기로 했다는 한나라당의 자문(自問) 리스트에서 "우린 왜 TK뿐일까"는 결코 빠져선 안 될 항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