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세상에 잠깐 공개됐던 국보급 문화재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상주본'이 종적을 감춘 지 3년 6개월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책을 갖고 있는 배모(49·경북 상주시·무직)씨가 입을 다문 채 주인에게 돌려주지도, 행방을 밝히지도 않고 있다.
2008년 7월 배씨가 들고 나온 이 책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보 70호로 지정된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상태가 좋아 국보급이었다. 그러나 한 달 뒤 상주시의 한 골동품 가게 주인인 조모(67)씨가 "배씨가 고서적 두 상자를 30만원에 사가면서 해례본을 몰래 훔쳐 넣어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배씨는 "집에 쌓여 있는 책을 정리하면서 찾은 것"이라고 맞섰다.
두 사람은 절도와 무고 등으로 맞고소를 했고, 물품 인도를 청구하는 민사소송까지 벌였다. 형사사건은 소유권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무혐의 처리됐으나, 민사소송은 3년여 재판 끝에 작년 6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배씨가 훔친 것이니 조씨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해례본은 종적을 감췄다. 검찰과 법원이 수차례 강제집행과 압수 수색을 했지만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검찰은 작년 9월 배씨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수감 중인 배씨는 해례본 행방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책은 당초 경북 안동시 광흥사의 나한상(羅漢像)의 뱃속에 들어 있던 복장(伏藏) 유물이었는데, 1999년 문화재 도굴 일인자로 알려진 서모(51)씨가 훔쳐 조씨에게 다른 고서들과 함께 5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해례본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해외 밀반출 징후가 포착됐다" "이미 팔아 수십억원을 손에 쥐었다. 구속되기 전 배씨가 평소보다 많은 돈을 쓰고 다녔다"는 등 온갖 의혹이 제기됐다.
상주시 관계자는 "배씨가 낱장으로 뜯어 비닐에 싸고 나눠서 숨겨놨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면서 "배씨가 옥살이를 하는 한이 있어도 돈을 챙기기 위해 해외 밀반출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구지검 상주지청은 26일 배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훈민정음 해례본 소재를 밝히지 않고 범행을 부인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숭례문만큼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라는 문화재청 의견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배씨에 대한 선고 공판은 다음 달 9일 열린다.
☞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3년쯤 지난 세종 28년(1446) 발행된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며,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돼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됐고,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간송본이 유일했으나, 2008년 상주에서 동일 판본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