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만날 때마다 마음을 우릿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모진 고초를 겪은 사람의 눈이 어찌 저리 따뜻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김근태는 정치를 하는 내내 '기자들이 뽑은 대통령감'에서 여야를 통틀어 2위 밑으로 내려간 일이 없었다. 그는 많이 알았고 깊이가 있었다. 세상 이치를 꿰는 능력이 있었고 그걸 풀어내는 말도 조리가 있었다. 세상 일이 직선으로만 가지는 않는다는 점도 잘 아는 듯했다. 운동권 출신에게 있기 쉬운 도덕적 오만, 타인에 대한 공격성 같은 게 그에게는 없었다.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의 전매특허인 편 가르기나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 얘기를 잘 들었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자, 우리 한번 얘기해보세"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치노선에 바탕해서 해야 될 얘기는 강하게 했다. 요즘 민주통합당 사람들이 구차하게 입장을 바꾼 한·미 FTA에 대해 노무현 정권 시절부터 명확하게 반대하고 단식까지 한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FTA에 대한 찬반을 떠나, 야권의 '반(反)FTA 노선'을 이끌 자격이 있는 사람은 김근태뿐이다.
그런 김근태에겐 큰 약점이 있었다. 이익 기피 증세였다. 그것도 중증(重症)이었다. 바로 눈앞에 떡이 있어도 제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정치인들이 그를 존경한다면서도 불편해한 부분이었다. 그는 선동도 하지 못했다. 상대방과 대화하고 동의를 얻기 전에는 밀어붙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고문 후유증이었는지 몰라도 연설도 잘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천성이 내지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김근태의 뼈아픈 눈물을 본 일이 있다. 2002년 3월 10일 울산종합체육관 VIP 대기실이었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둘째 날 결과가 발표된 직후, 후보들이 있던 VIP 대기실을 스케치하기 위해 들어갔다. 첫째 날 제주 3위에 이어 울산에서 1위를 한 노무현 후보는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축하를 받고 있었다. 제주 2위, 울산 3위를 한 이인제 후보는 대세론에는 상처가 갔지만 표정은 괜찮았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김근태 후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엔 아무도 없었다. 제주에서 단 16표로 꼴찌인 7위, 울산에서 10표로 더 내려가 또 7위, 종합해서 까마득한 꼴찌였다. 정동영·한화갑은 물론 김중권·유종근에게까지 뒤지는 결과였다. 그의 옆에 다가갔지만 말도 걸지 못했다. 세상의 끝까지 갔다 온 김근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 날 후보를 사퇴했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둔 TV 토론 녹화 자리에서였다. 프로그램 보조자가 김근태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몇 번의 채근이 이어졌다. 그가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개가 항상 삐딱하게 기울어 있었다.
김근태가 갔다. 그는 큰 권력을 향유하지도 못했고, 정치 현실을 바꾸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기자는 "그만한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입력 2012.01.0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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