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김규식의 프랑스어 편지

조선일보
  • 박해현 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11.12.11 23:17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은 1887년 여섯 살에 고아가 됐다. 선교사 언더우드가 어린 김규식을 맡아 키웠다. 김규식은 1897년부터 7년 동안 미국에 유학해 프린스턴대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성적표에는 프랑스어·독일어·라틴어 점수도 높았다. 연희전문에서 강의하던 그는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30여년을 바쳤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채호는 영어를 읽을 때마다 우리말 조사(助詞)를 꼭 넣었다. 'I는 am a boy'라고 하는 식이었다. 문장마다 '하여슬람'이라며 한문 읽듯 토도 달았다. 김규식은 매번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야단쳤다. 신채호는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까다롭게 군다"며 투덜댄 뒤 영어 선생을 소설가 이광수로 바꿨다.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1차대전 전승국들이 강화회의를 열었다. 김규식은 파리 9구 샤토덩가 38번지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냈다. 8월까지 머물며 각국 대표에게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 프랑스 인권협회와 공동 연설회도 열었다. 그의 열성 덕분에 유럽 181개 신문에 대표단 활동 기사가 517건이나 실렸다.

    ▶김규식은 광복 후 이승만·김구와 더불어 민족진영 3대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25 때 납북돼 12월 10일 평북 만포의 군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일 김규식 61주기를 맞아 주불 한국대사관이 그의 친필 편지를 공개했다. 유려한 프랑스어로 써서 프랑스 교육부 국장 브뤼셀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우리의 독립 요구가 달걀로 바위 치기 같은 일이지만 브뤼셀 국장의 지지 편지 같은 글들이 소중한 격려가 된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지난달 타계한 재불(在佛)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는 생전에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파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규식이 머물렀던 샤토덩가 38번지가 독립기념관으로 가장 알맞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외 독립운동 연구는 중국과 미국에 치우쳤지만 유럽에도 사료(史料)가 많다. 김규식이 프랑스어로 친필 편지 외교를 벌였던 '임시정부 파리위원회'는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로 기리기에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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