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스탈린, 매우 단순·무례하고 잔인했다"

조선일보
  • 이송원 기자
    입력 2011.11.30 03:14

    학살자의 딸 스베틀라나, 미국에서 85년 영욕의 삶 마쳐
    "공산주의는 영적인 괴물" 두 자녀 러시아에 놔둔채 1967년 美에 정치적 망명
    부친 숨지자 어머니姓 따라… "늘 아버지 그림자에 짓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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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내게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던 스베틀라나 스탈리나(85·사진)는 1983년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 딸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이같이 표현했다. 스탈린의 세 자녀 중 하나뿐인 딸이었던 그가 지난 22일 미국 위스콘신주 사설 요양원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8일 보도했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과 그의 둘째 부인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어머니가 자살한 이후 유모 손에 자랐다. 스탈린은 딸을 '작은 참새'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스베틀라나도 작년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고 내가 함께 있길 바랐으며, 교양있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탈린이 스베틀라나의 첫사랑이었던 유대인 영화감독을 시베리아로 보내며 부녀 관계는 틀어졌다. 스탈린이 죽자 그는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이후 아버지에 대한 스베틀라나의 인물평은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스베틀라나가 어린 시절 자신을 '작은참새'라 부르며 귀여워하던 아버지 스탈린에게 안겨 있는 모습. /AP 뉴시스
    스베틀라나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7년 미국에 귀화하기로 결심한다. 인도인이었던 세 번째 남편의 유해를 뿌리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을 때다. 그는 뉴델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며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부인해 왔던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미국 공항에 도착해서는 소련 여권을 불태우고 공산주의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괴물'이라 비난하며 조국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두 자녀를 러시아 땅에 남겨둔 채였다.

    미국에 정착한 스베틀라나는 네 번째 남편인 미국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남편 성을 따라 '라나 피터스'로 개명했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도 네 권 썼다. 그는 책에서 수백만명을 노동 수용소에 보낸 스탈린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또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다.

    1984년 그는 두고 온 자녀를 만나고자 다시 러시아 땅을 밟기도 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 친척들과 불화를 겪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의 그늘 밖에서 살려 했지만, 아버지의 망령은 그의 일생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WP는 전했다. 스베틀라나는 2007년 자신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정체성 혼란을 고백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스탈린의 딸, 스탈린의 딸'이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권총을 들고 다니며 미국인을 쏠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또 '아니다. 그는 이곳에 왔고 미국인이 됐다'고 말한다. 이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칠 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스탈린의 두 아들인 바실리와 야코프의 삶도 순탄하지 못했다고 BBC는 전했다. 야코프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게 붙잡혔고 스탈린이 독일 장군과 아들의 교환을 거부하면서 집단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 바실리는 러시아에서 40세에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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