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경주 최부잣집' 종손 최염씨

조선일보
  • 선임기자
    입력 2011.11.27 23:28

    "진짜 돈 없는데 '최부자'로 불러주니… 내가 富者라는 착각을"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만 석이 넘으면 내놓아라"
    전 재산 대학 설립에 내놓아 최부잣집은 영남대 소유로 '교동법주'는 먼 친척이 운영

    "내가 진짜 돈 없는 사람으로 안 보이는 모양이오. 숨겨놓은 게 있겠지 합니다. 자가용이 없는 지가 10여년 됐어요. 남들이 물으면 걷는 게 건강에 좋다고 대답해요."

    '경주 최부잣집' 종손이라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나올 줄 알았는데, 양복 셔츠의 아래쪽이 약간 불룩한 최염(78)씨는 모던한 노신사였다.

    그는 경주보다 서울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다. 더 이상 만석꾼 지주가 아니었다. 가족을 이끌고 처음 상경했을 때는 셋방살이도 했다. 여러 사업에 손을 대 돈을 왕창 벌기도 했고 금세 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 이력을 보면, 이것저것 했는데 대부분 결말을 못 보고 끝나요. 내게는 이재(理財)에 대한 절박한 투쟁, 죽기 살기로 해보는 근성이 별로 없어요. 몇 백 년 전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오는 피가 흐르는 것인지."

    얼마 전 미국 백만장자들이 '우리 세금을 올려달라'며 의회를 찾았다. 이들이 "우리가 세금을 더 내려는 것은 자선 차원이 아니다. 장차 우리 부자들에게 닥쳐올 위기를 막으려는 '계몽적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을 때, 나는 9대(代)까지 만석을 지켰다는 경주 최부잣집을 떠올렸다.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세상에 내놓아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위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선생이 자랄 때도 이런 가르침이 실재했나요?

    "나는 종손이라 6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한 방을 썼어요. '이제 네게 물려줄 만 석은 없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했다'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요. 부귀영화를 다 가질 순 없고 설령 가진들 오래가지 못한다, 부자가 벼슬이나 권력까지 탐하면 넘치는 것으로 여겼지요. 항상 절제하고 인심을 잃지 않아야 오래간다고 했지요."

    최염씨는“주변이 못사는데 혼자만 풍요를 누릴 수 없는 게 세상 사는 이치”라고 말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경주 최부잣집은 언제 시작된 겁니까?

    "병자호란이 끝난 뒤 버려진 땅을 개간하면 소유권을 줬어요. 그 전답으로 소작을 줬고, 돈을 빌려줘 장리(고리채)를 받았지요.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나, 집안을 일으킨 9대조께서 '돈이 없어도 못 갚고 있어도 못 갚는 걸 어떻게 하겠나'며 채권 장부를 불살랐어요. 소작료도 절반으로 낮췄지요."

    ―수입이 줄어들었을 텐데요.

    "속담에 '사촌 논 사면 배 아프다'고 하지만, 우리가 논을 사면 모두 기뻐했어요. 어디에 좋은 논이 나오면 '최부자께서 사주세요' 하며 찾아왔어요. 우리 논이 많을수록 소작인들은 적은 소작료로 더 많은 농사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논을 사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한 거죠."

    ―흉년에 논을 사지 말라고 한 가르침은요?

    "흉년에 논을 내놓는 것은 절박한 처지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 논을 안 사도 다른 사람이 삽니다. 논을 안 사주면 안 되죠. 그 본뜻은 제값 주고 사라는 겁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부를 취득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는 농경사회 지주(地主)의 덕목인데, 네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의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서는 현실감이 부족한 게 아닐까요?

    "어찌 보면 구닥다리 얘기인데, 하지만 주변이 못사는데 혼자만 풍요를 누리진 못해요. 독불장군은 없어요. 어떤 세상이 와도 먹고 사는 이치는 비슷하지요."

    ―재력은 넘쳤지만 분수를 지키기 위해 최부잣집은 100칸을 넘지 않도록 했다면서요?

    "내가 살았을 때는 50칸쯤 됐을 겁니다. 정미소, 행랑채, 작은 사랑채들이 없어졌어요. 집이 2000평, 후원까지 합치면 1만3000평이었지요."

    ―지금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살림은 그대로 놔두었지만, 그 집은 영남학원(영남대 재단) 소유로 넘어갔어요. 나는 경기도 분당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묘사(廟祀)를 지낼 때면 내려갑니다. 그 집에는 할머니 한 분만 관리를 위해 안채에 거주하고 있어요. 이 노인은 우리 어머니가 계실 때부터 집안일을 쭉 도왔던 분입니다."

    ―최부잣집에 대해 해설하는 분도 있던데요.

    "봉급을 받고 관광객 안내를 해주는 경주역사해설사입니다. 최씨이지만 같은 집안은 아니고."

    ―고택 옆에 붙은 '교동법주(法酒)' 제조창은요?

    "최부잣집 명성으로 생긴 것인데, 먼 친척이 되지만 직접 관계는 없어요. 원래 우리 집에서 가을 햅곡으로 청주를 빚어왔어요. 지금도 집안에서는 제사 용도로만 만들고 있어요."

    ―교동 고택에는 언제까지 살았습니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구로 유학가면서 떠난 셈인데, 모친은 1990년대까지 계셨어요."

    ―선생이 기억하는 그때의 집안 풍경은요?

    "마당 한쪽에 말 두 마리, 소 두 마리, 인력거가 있었던 걸 기억해요. 손님이 왔을 때나 잔치·제사 때는 상차림이 푸짐한데, 일상에서는 검소했어요. 소고깃국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상에 올라왔어요. 일꾼들이 많았어요. 새경으로 벼 다섯섬을 주는 상머슴, 3섬을 주는 중머슴, 춘하추동으로 옷 두 벌씩 지어주고 잠을 재워주는 하머슴이 있었지요. 일찍 종(노비)을 해방시켰는데 '이 집을 떠나 못 산다'며 그대로 머물렀던 늙은 종들도 있었어요. 아들 중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었지요."

    ―최부잣집 땅을 안 밟고는 경주 일대를 지나갈 수 없다는 말도 있었는데, 정말 그 정도입니까?

    "추수할 때면 소작료를 정하기 위해 작황을 보러 가는 마름들을 따라가곤 했어요. 하지만 우리 땅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동해안 감포에 가니 미역을 기르는 그 일대 갯바위도 우리 소유였어요. 소작인이 밭에 김을 매듯이 다른 해초를 뽑아내고 있었어요."

    1970년대 경주 최부잣집 풍경.
    ―그렇게 자기 관리를 잘해온 경주 최부잣집이 어쩌다가 기울게 됐습니까?

    "할아버지(최준)께서 1919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세운 '백산무역'의 사장을 맡았어요. 그때 만석꾼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겁니다. 본인 보증으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아 운영했지요. 그 회삿돈을 독립자금으로 빼내간 겁니다. 결국 1928년 회사가 부도났어요. 부채 규모가 집안 재산의 3배쯤 됐지요."

    ―그때 이미 경주 최부잣집은 파산한 것이군요.

    "식산은행이 우리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갖지도, 압류 경매도 하지 않았어요. 부채 일부만 상환시키고 나머지는 신탁관리를 했습니다. 수확철이면 벼가마를 실은 우마차가 집 창고로 들어오는데 줄이 끊어지질 않았어요. 그게 우리 것이 아니라, 식산은행이 신탁관리하는 것이었지요. 일본이 패망하고 떠나면서 채권이 소멸됐습니다. 우리집 재산이 보존된 것이었죠."

    광복 후 경주 최부자는 후학 양성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대구대학을 세웠다. 이듬해(1948년) 농지개혁이 있었다. 정부가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발행해주고 농지를 매입했다. 이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유상분배했다. 지가증권은 물가가 뛰자 휴지가 되다시피 했다. 발 빠르게 이를 산업자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지주의 몰락이 진행된 것은 틀림없었다.

    ―그걸로 300년 지속된 최부잣집이 막을 내렸군요.

    "농지개혁은 농토만을 대상으로 했어요. 임야, 과수원, 위토답(묘소를 지키는 논)은 제외돼 그때까지는 재산이 좀 남아 있었어요."

    ―그 재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6·25가 터진 뒤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金凡夫·동양철학자)가 할아버지를 만나 '서울서 내려온 학자와 교수들을 위해 경주에 조그만 대학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남은 재산을 모두 집어넣어 '경주학숙'이라는 2년제 대학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휴전이 되자 교수진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버린 겁니다.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지요. 어쩔 수 없어 대구대와 합병했지요."

    ―조부의 재산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자손에게 그걸 잘 물려줄 의무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 조부의 결정으로 선생에게는 유산이 끊겼습니다.

    "이때는 할아버지께서 '남은 재산을 다 대학에 기부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내 의견을 물었어요. 나는 집도 없고 절도 없어진다, 서운한 감정이 좀 있었으나 그 뜻을 알기에 반대할 수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대학에서 열심히 일하면 사는 데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모든 재산이 들어간 대구대는 운영난을 맞았다. 5·16이 있은 뒤 도서(圖書), 학교 건물이 기준에 미달되면 퇴출시키는 '사립대학 정비령'이 발표됐다. 신규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학교를 맡겠다고 나섰다.

    "교동 집으로 이병철 회장이 찾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자네 고려대학 교주(校主)가 누군지 아는가?' 물었어요. '인촌(김성수) 선생 아닙니까?' '그건 잘못 알고 있다. 원래 설립자는 이용익(李容翊)이다. 2대는 손병희다. 손병희는 3·1운동을 준비하느라 대학을 인촌에게 맡겼다. 오늘날 다들 인촌을 설립자로 생각한다. 자네도 대구대를 잘 운영하면 그런 설립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자 이 회장은 '한수 이남에서 제일가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이 회장은 대학 운영권에 대한 대가를 내놓고 싶어했어요. 할아버지는 내게 '이병철한테 양복 한 벌 얻어 입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대구대는 이후 청구대와 통합돼 지금의 영남대가 된다. 영남대의 설립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나와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한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경주 최부자는 전 재산을 집어넣었지만 대학 운영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잃었다.

    그는 상경해 심계원(감사원 전신)에서 잠깐 근무했고, 그 뒤로 경량철골 제조공장을 하는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 1970년대 후반 파란을 일으켰던 율산(栗山)의 신선호 사장과 합작을 하기도 했다. 해운업에도 뛰어들었다.

    "한때는 재산을 600억쯤 모으기도 했어요. 그 돈으로 경기도 성남에서 10층 빌딩을 짓고 볼링장을 열었지요. 환율 700원에 볼링기계를 리스해온 겁니다. IMF가 터지자 환율이 2100원까지 올라갔고, 손님들도 썰물 빠지듯 빠졌어요. 그게 내 사업 이력의 끝입니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는데, 최부잣집 종손으로서 선생은 주위에 베풀고 살았나요?

    "내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내 돈 안 쓴 사람이 없었어요. 이제는 현실적으로 안 돌아가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최부잣집 종손'으로 소개하면 정말 내가 최부자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요."

    ―실제 부(富)는 떠나가고 이름만 남았군요.

    "그런 셈인데…, 지금도 대구대에 내놓을 당시 빠진 할아버지 재산이 가끔 나와요. 어느 땅에 세금을 내라고 고지서가 날아옵니다. 전혀 생각지 않은 불로소득이긴 한데, 허허."

    ―지금까지 부친에 대한 얘기는 없군요.

    "아버지는 날아가는 까마귀에게도 술 마시라고 할 정도로 한량이었어요. 돈을 만들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알았지요. 할아버지는 내게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마냥 착한 것은 악한 것보다 못하다)'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어요. 후계자로 아버지를 배제했지요."

    ―아들이 판사로 재직 중인 걸로 압니다. 최부잣집 규칙으로는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때는 부자였고 지금은 아닌데, 하지 말라면 아들 보고 굶어죽어라는 소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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