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三食씨, 밥 먹읍시다"

조선일보
  • 전신현 개포감리교회 협력목사
  • 이철원
    입력 2011.11.22 23:02

    퇴직한 남편 밥시중 스트레스로 우울증 앓는 주부 많다는데
    은퇴한 남편이 내 눈치 볼 때 도리어 미안해져
    남편과 함께하는 식사 아니면 나 혼자 밥상 제대로 차릴까

    전신현 개포감리교회 협력목사

    항상 밝은 표정으로 사람을 잘 웃기던 K여사가 언제부터인지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수가 줄어들더니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10여년간 지방근무를 하던 남편이 정년퇴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부터다. 병의 원인은 하루 세끼를 모두 집에서 먹는 '삼식(三食)이' 남편의 밥시중을 들면서 생긴 스트레스로 판명났다.

    K여사 남편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으려는 듯 "이젠 마나님 수발을 받으며 여생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며 은근히 압박했다. K여사는 남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막상 당해보니 하루 세 번 밥상을 차려 올리는 것이 간단치 않더란다. 아이들을 다 키워서 떠나보내고 홀가분한 노년을 즐기려던 참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수십년간 '일식(一食)이'나 '이식(二食)이'와 사이좋게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삼식이' 남편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것 같았다.

    옛날 어머니들이 들으시면 '호강에 넘쳐서 벼락 맞을 소리'라고 불호령을 내릴 만하지만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 60대 여성들에겐 '삼식이' 남편이 심각한 문제다. 어떤 재혼(再婚) 부부는 "그놈의 밥 때문에 멀미가 나서 곧 이혼해버렸다"는 얘기도 들렸다. '삼식이' 남편을 어떻게 지혜롭게 다독거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느냐가 정년 후 남편을 맞는 주부들의 최대 고민거리이다.

    내가 마흔 넘어서 뒤늦게 공부를 더 한다며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들 기르면서 신문과 여성잡지, 베스트셀러 책 몇 권을 읽는 게 고작이었던 내가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학문인 조직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개론서에 영어로 된 원서(原書), 그리고 그리스어까지 배워야 했을 때의 아찔함은 지금 생각해도 등에서 진땀이 흐른다. 겁 없이 덜컥 입학은 했지만,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과의 힘겨루기는 매번 KO패로 끝나는 어이없는 싸움이었다. 그러자니 밤 10시가 넘어야 도서관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이 다반사였다. 늦은 밤에 내 실력 부족을 뼈아프게 절감하면서 귀가하는 날은 유난히 더 배가 고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밥 타는 냄새가 사정없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모른 체하며 방으로 들어와 책가방을 던지니, 남편이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고 밥상을 차렸다. "배고프겠다. 빨리 먹어,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기운이 달리지?" 그 한 마디에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 말았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큰아이가 다가와 소곤거렸다. "엄마, 오늘은 아빠가 회사에서 늦게 오셔서 빨리 밥을 짓느라고 다 태웠지 뭐예요. 그래서 우리는 노란 밥을 먹었고, 아빠는 물 부어서 누룽지를 잡수시고, 엄마 밥만 겨우 하얗게 뜬 거라고요." 그렇게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몇 번 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며칠 전, 저녁 무렵에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은 10년 전쯤 퇴직하고 소일 삼아 시내 사무실에 나간다.

    "나 지금 집에 들어가려는데, 당신은 뭐 해?"

    "뭘 하기는…."

    "저녁 짓기 싫겠지?"

    "말이라고요?"

    "그럼, '○○보리밥' 집으로 내려와."

    총알같이 나가서 남편과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다.

    '간 큰 남자' 시리즈에 밤늦게 들어와 밥 달라고 소리치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가끔씩(늘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간 큰 남자'를 보고 싶다. 칠남매의 맏이로 지금까지 형제들을 보살피고, 직장에서의 어려움도 내색하지 않고 꾹꾹 참으며 열심히 일하다가 양쪽 눈에 백내장으로 실명(失明)의 위기까지 겪었던 남편이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까지 생기려고 한다. 어찌 내 남편뿐이랴.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가정을 지켜온 수많은 우리의 갸륵한 남편들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에게 밀려나 점점 어깨가 처지는 것도 안쓰러운데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는 날이면 "점심은 밖에서 시켜 먹자"며 오히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다. 남편과 함께 하는 식사가 아니라면 주부인 내가 점심상을 제대로 보겠는가. 혼자라면 그냥 냄비를 들고 와서 비벼 먹든지, 김치도 썰지 않고 쭉 찢어 먹든지 했을 것이다. 평생 솜씨 없이 차리는 밥상일망정 군소리 없이 먹어주는 남편이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갖춰 먹게 되니 말이다.

    오늘 점심에는 멸치와 다시마 국물에 국수 말아서 김치 송송 썰어 얹고, 며칠 전에 먹다 남은 양념 불고기를 고명으로 올려서 밥상을 차려야겠다. 그리고 목소리도 명랑하게 남편을 부르리라. "삼식씨, 밥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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