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연필 제국' 이끄는 파버카스텔 회장

조선일보
  • 신동흔 기자
    입력 2011.11.12 02:59 | 수정 2011.11.13 10:37

    연필 만드는 백작님
    8代 250년의 독일 파버카스텔社- 육각형 연필 처음 고안해 내고 B(짙기) H(강도) 연필심도 제작
    100여년전 빈센트 반 고흐부터 디자이너 라거펠트·화가 라우흐 노벨상 권터 그라스까지 애호
    '손으로 쓰는 것'은 영원하다- "아이패드 터치하며 자란 세대들 어른 되면 쓰기 자체는 줄겠죠
    그러나 쓰고, 그리고, 색칠하는 창조적인 생산을 이루어내는 건 오히려 비중 더 커질 겁니다
    디지털이 못하는 뭔가가 연필 한 자루엔 담겨 있습니다"

    "이 연필은 딱 알맞은 굵기에 부드럽고 질이 좋아. 검은색이 아름답고 큰 그림을 그릴 때 좋더군. 부드러운 삼나무로 만들었고 겉은 '짙은 녹색'이야."(1880년대 후반 빈센트 반 고흐가 네덜란드 화가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 고흐가 동료 화가에게 추천한 짙은 녹색의 '이 연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생산업체인 '파버 카스텔'사(社) 제품이다. 1761년 독일 남부 뉘른베르크 인근 오두막에서 얇은 나무 막대기 사이에 흑연심을 끼운 초창기 연필을 만들기 시작한 이 회사는 8대 250년을 거치며 전 세계 120개 국가에 진출해 '연필의 제국'을 건설했다.

    파버카스텔은 현대 연필의 표준인 육각형 연필을 처음 고안했다. 지금은 표준이 된 18㎝ 길이 연필이나 짙기(B)와 강도(H)별로 세분화된 연필심도 파버가 처음 만들었다. 100여년 전 고흐가 썼던 연필로 지금은 칼 라거펠트 같은 유명 디자이너, 오스카 코코쉬카, 네오 라우흐 같은 현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도 파버카스텔 연필 애호가로 유명하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파버카스텔 250주년 기념' 월드투어 행사장에서 만난 8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은 주머니에서 짙은 녹색의 '카스텔9000' 시리즈 연필 두 자루를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색깔과 무게, 질감에서 두 연필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다만, 한 자루에는 'Made in Bavaria'라고 씌어 있었고, 나머지 한 자루에는 'Made in Germany'라고 씌어 있었다. 19~20세기 초 독일 남동부 지역(지금의 바이에른주)의 옛 왕국인 '바바리아'란 표기가 없었다면 100년 전 만들어진 제품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978년 가업을 승계해 33년째 이끌고 있는 파버카스텔 백작은 190㎝의 훤칠한 키에 은발로 변한 금발이 더 잘 어울리는 기품있는 70대 노신사였다. 그는 행사장을 찾은 손님들과 즐겁게 인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백작 자체가 브랜드'였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의 시대에 100년 전 연필을 아직도 만드는 이 회사 CEO는 인류가 '(손으로) 쓰는' 활동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시점에도 자신감이 넘쳤고, 필기구 산업의 미래를 낙관했다.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이 2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제작한 대형 연필 모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8대를 이어 내려온 가업은 그를 거쳐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연결 고리’로 본다고 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올해 미국 일부 주(州)가 초등학교에서 필기체 연습 대신 타이핑 연습을 의무화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은 위기가 아닙니다. 세상은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선 옛날의 흑연 연필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연필에서 어린이용 색연필, 예술가용 화구(畵具), 화장용 붓과 연필 등 우리가 만드는 다양한 제품을 지역별로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잘 캐치해내는 것이 우리의 장점입니다."

    ―자판을 두드리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손끝으로 종이 대신 모니터를 직접 터치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쓰기'라는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해진 것은 사실 아닌가요.

    "물론 시간이 좀더 흐른 뒤 현재 아이패드 세대로 자라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시점에는 실제로 위기가 닥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두뇌 개발을 위해 손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쓰기'와 '그리기' 등의 교육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쓰기는 줄어들지 몰라도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창조적 활동의 비중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쓰는' 필기구만 만들지 않고, 창조적 활동과 관련된 도구를 개발하며 미래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100년 뒤에도 연필을 쓰고 있을까요. 연필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요.

    "연필은 경제적이면서 환경 친화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년 동안 존재해왔습니다. 러시아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를 선회했을 때 우주에 가지고 간 필기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연필 한 자루였습니다. 완벽한 무중력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필기구죠."

    1 연필 끝에 은도금이 되어 있어 6자루 1세트에 7만원이 넘는 ‘그라프 폰 파버카스텔’의 ‘No3.데스크 펜슬’. 2 파버카스텔이 생산하는 입술 전용 화장용품 세트.
    ―백작께서도 아이패드나 노트북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실용적인 아이패드나 아이폰, 블랙베리, 노트북 등은 저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창조적 활동을 위한 생산품 분야에서는 컴퓨터나 아이패드가 우리의 경쟁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손으로 만져서 창조적 활동을 하는 제품 중에 '레고'가 있는데, 레고는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준 100년 전 연필은 요즘 연필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좋은 연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필은 어느 회사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평범한(ordinary) 일을 비범하게(extraordinary) 잘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회사의 철학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필은 잘 부러지지 않고 긁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보존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70년대 계산기가 들어오고, 80년대 이후 디자인과 제도 등 그동안 손으로 하던 작업을 컴퓨터가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 시기는 제가 경영을 맡게 된 시기와도 겹칩니다. 나는 제품군을 크게 어린이용 필기구, 예술가용 화구, 연필용품, 사무용품으로 나눠 '전략적 재정비'를 추진했습니다. 기존 제품을 고객 요구에 맞춰 새롭게 개발한 것이죠."

    파버카스텔 백작은 취임 이후 화장용품 시장에 진출했고, 과거 귀족들이 몸에 지니던 포켓용 연필과 비슷한 '퍼펙트 펜슬', 오톨도톨한 돌기가 박힌 은색 삼각형 연필 '그립2001' 등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하며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동안 외면했던 고급 만년필 등 프리미엄 제품 라인으로 구성된 '그라프 폰 파버카스텔'을 만든 것도 8대째 가업 승계자로서 그가 내린 결단이었다.

    ―시장이 어려울 때 필기구 외의 다른 분야로 진출할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의 토대가 되는 분야를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면 원래 시작했던 분야를 완전히 정복했을 때일 것입니다."

    ―퍼펙트 펜슬은 과거 귀족들이 휴대용 필기구로 케이스에 넣어 다니던 작은 연필을 연상시킵니다. 과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인가요.

    "예전에는 휴대를 위해 연필을 작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퍼펙트 펜슬은 한 자루의 연필로 쓰고, 지우고,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 1905년에 나온 카스텔 연필. 당시 바이에른 지역을 통치했던 ‘바바리아 왕국’ 제품임을 표시하는 ‘Made in Bavaria’ 글씨가 선명하다. 2 지우개와 익스텐더 캡, 연필깎이 일체형인 ‘그라프 폰 파버카스텔’ 라인의 퍼펙트 펜슬.
    ―네오 라우흐를 비롯한 유명 화가들이 파버카스텔에서 새롭게 고안한 특수 펜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네오 라우흐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저희가 개발한 'PITT 아티스트'라는 펜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유화를 그렸던 이 작가는 우리가 개발한 펜으로 바꾸면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예술가들을 주요한 소비자로 보고 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수요에 맞는 새로운 창작 도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백작께서 경영을 맡은 이후 1600만원짜리 퍼펙트 펜슬 등 럭셔리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럭셔리란 무엇입니까.

    "과도함이나 과시를 부추기는 럭셔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뭔가 특별한 것이란 의미의 '럭셔리'는 훌륭한 장인 정신과 우수한 기능이 함께하는, 흔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창업자인 카스파르 파버는 원래 장롱을 만들다가 연필로 눈을 돌린 장인(匠人)이었다. 연필 산업의 큰 성공으로 4대인 로타르 폰 파버 시대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5대를 넘기면서 한때 대(代)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로타르 남작의 손자들이 일찍 죽었고, 비탄에 빠진 그의 아들마저 42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남은 것은 손녀들밖에 없었다. 로타르 폰 파버는 바이에른의 명문 귀족 카스텔 백작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손자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기로 했다. 이때부터 '파버'와 '카스텔'을 합친 파버카스텔을 성(姓)으로 삼는다. 슈나이더(Schneider·재단사), 바우어(Bauer·농민), 슈미트(Schmidt·대장장이) 등 직업에서 유래한 다른 독일 성씨들처럼, '무언가를 만든다'는 의미를 연상시키는 파버(Faber) 가문의 '장인 DNA'는 그렇게 250년 뒤까지 이어지게 됐다. 기업의 발원지이자 본사가 있는 뉘른베르크 인근 스타인(Stein)에는 3~4대째 이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는 주민들도 수두룩하다. 100여년 전 만들어진 500여 호의 직원 사택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치 그 옛날 유럽의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러했듯이 파버카스텔 백작은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가끔은 귀족이라는, 가족의 유명한 이름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저희의 이름은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공하려면 가업의 후계자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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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연필을 생산하는 파버 카스텔 창사 250주년을 기념하여 8대째 가업을 잇는 안톤 볼프강 폰 파버 카스텔이 8일 방한해 연필을 소개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250년의 역사, 파버사의 연필과 공장 모습.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250년간 가족 경영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태도'입니다. 스스로를 연결고리로 보고, 성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것은 몇 번의 멋진 도약이 아니라 과거에 옳다고 증명된 일을 계속하는 끈기입니다."

    ―파버카스텔은 1884년 근로자 건강보험을 고안하고, 직원 자녀를 위한 보육시설과 학교, 도서실, 직원 사택, 연금제 등 각종 복지제도를 독일 최초로 도입한 기업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떻게 120여년 전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제 고조부인 로타르 폰 파버의 업적입니다. 그분은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지만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업무 여건을 개선한 것입니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은 후계자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덕목입니다."

    ―후대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까.

    "항상 낙천적으로 시장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낙천적으로 보되 소비자의 변화와 시장 변동을 항상 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롭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연필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연필은 '취미'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연필과 필기구를 갖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까 궁리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 아버지가 '연필공장을 물려받으라'고 했을 때 런던의 금융가에서 일했던 저로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은 제게 취미처럼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전통이 중요합니까, 혁신이 중요합니까.

    "전통을 고수하는 것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승해야 할 전통은 제품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소비자의 변화와 시장의 변동을 주시하면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세밀한 부분에서 지속적으로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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