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말년 민심 이반은 심각하였다. 익명의 글이 돌았다. "어떤 임금이기에 파리 목숨 끊듯이 사람을 죽이는가!" 군신관계는 결딴났다. 신하들은 묵언패(默言牌)를 목에 걸고 언제 목숨을 앗길지 전전긍긍. 사느냐, 죽느냐! 생존게임이 벌어졌다.
연산군 12년(1506) 8월 전라도 김준손(金駿孫)·이과(李顆)·유빈(柳濱)이 거사를 도모하였다.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자! 궁중의 연회와 사치를 비판하다가 쫓겨온 적객들이었다. 남원시 운봉의 김준손이 앞장섰는데, 김일손의 백형이었다. 박상의 '우부리 장살사건'에 눈귀가 쏠릴 때였다. 옥과현감 김개(金漑)가 적극 활약하였다. 장성군 황룡면 출생, 본관은 영광. 연산군 7년(1501)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박사를 지냈다.
호응은 빨랐다. 9월 10일, 남원 광한루 출정이었다. 반정과 반란의 길목에서 혼선을 막고 호응을 요청하기 위하여 도성에도 알렸다. 여의치 않으면 진성대군을 남으로 호위할 계획이었다. 내전에 대비한 것이다. 9월 1일, 김개가 격문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바로 이튿날, 남녘의 통보를 이미 받았던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궁궐을 장악하였다.
중종반정! 그러나 '좋은 나라'를 향한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신 선정부터 엉망, 뇌물이 오갔다. 인사도 난맥, 공신과 외척 본위였다. 도처에서 탄식했다. "공신 때문에 나라가 병들었다."
중종 4년(1509) 2월 김개는 옥과현감을 마치고 조정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허망하였다. 원(原)공신 아닌 원종(原從) 2등이라서가 아니었다. 공신외척에 휘둘리는 국왕이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거듭 사뢰었다. "폐위된 임금도 외척과 소인을 등용하다가 화패(禍敗)를 당하였습니다."
김정(金淨)에게 안타까움을 풀었다. "구름 외로워 갑절이나 어두컴컴한데, 늦가을 하늘 아래 앙상한 몰골이 변방 노래 부르네." 김정은 반정 이듬해(1507) 증광문과에 장원한 충청도 보은 출신 신예였다. 대꾸 또한 심상치 않다. "홀로 있어 기막힌 시름이 곱절이나 깊어라, 은하수 하늘 바라보며 부모님 그리워하네."
결국 몇 달을 버티지 못하였고 고부·부안의 수령을 맡았다. 그리고 거푸 양친상, 시묘 중에 깊은 병이 덮쳐 고창 바닷가로 훈욕(熏浴)갔다가, 그만 세상을 버렸다. 해수찜이나 온천이었을 것이다. 최후는 처량하였다. 어린 아들이 홀로 울며 널을 따를 뿐. 이웃 마을 김령(金齡)이 통곡하며 호상을 맡았다. 훗날 문묘에 오른 김인후(金麟厚)의 부친이다.
박상이 혼백(魂魄)을 붙잡는 만사(挽詞)를 보냈다. 애틋한 기억이 얼마나 많았을까? 칠언율시 5수나 되는데 첫 구절만 본다.
"나와 문장은 쌍벽이었지만 그대가 이름을 먼저 알렸고, 홍문록에 번갈아 올랐지만 그대가 훌쩍 뛰어넘었지."
홍문록은 국왕의 학술자문기관인 홍문관에 봉직할 정예관료의 명단이다. 이때 박상은 '예로부터 반역은 공신으로부터 많이 나왔다' 하였다가, 담양부사로 밀려나 있었다. 김정도 얼마 후 이웃 순창군수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