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28> '엉뚱함의 최고봉' 조영남

조선일보
  • 윤형주
    입력 2011.10.29 03:14 | 수정 2011.10.29 11:05

    명동서 예쁜 여자 나타나면 "뒤에 일렬로 따라붙어"

    조영남 형은 내 노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배다. 고교 1학년 때, 영남 형의 '예수 나를 위하여' 찬송가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처음 생각했다. 1968년 미8군 무대에서 형이 무반주로 '올드 맨 리버'를 부를 때 흑인들의 까만 피부 위로 눈물이 흐르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데뷔 초기 조영남이 젊은 여성팬들에 둘러싸여 웃고있다. /윤형주 제공
    그러나 무대 밖의 영남 형은 엉뚱하고 새로웠다. 같이 서울 동신교회를 다니던 고등학생 시절 얘기다. 교회에서 헌금 걷을 시간이면 형이 뒤에서 막 나를 찌르곤 했다. 돌아보면 한결같이 "돈을 꿔달라"고 부탁했다. 1인분 헌금을 2인분으로 나눠 내자고도 했다. 몇 번 들어주다가 하루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형을 교회 밖으로 불러냈다.

    "형, 헌금은 각자 하나님께 정성껏 바치는 거래요. 이렇게 자꾸 꿔달라니까 힘들어요. 그리고 그동안 빌려간 돈은 왜 안 갚아요?"

    형이 고개를 점점 숙였다. 됐구나 싶었다. 그러나 영남 형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어안이 벙벙해진 건 내 쪽이었다. "너, 헌금 누구한테 드리려고 가져왔느냐?" "하나님요." "그럼 헌금이 네 것이니 하나님 것이니?" "… 하나님 거요." "왜 네 것도 아닌데 말이 많으냐?"

    교회에서 불편한 순간은 또 있었다. 성찬식 날이 오면 세례를 받은 교인만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을 먹는다. 영남 형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적어도 포도주를 석 잔 이상 마셨다. 마시곤 '크으' 하고 만족한 소리를 냈다. 영남 형은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마음에 찔리지 않는지, 은근슬쩍 물었다. 형이 답했다. "응, 난 죄가 좀 많아서."

    세시봉에 드나들 무렵에도 형의 엉뚱함은 계속됐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영남 형의 지시 아래 6~7명이 뒤에 일렬로 따라붙었다.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여자 몰래 뒤에서 같이 걸었다. 여자가 이상하다 싶은지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 다 똑같이 뛰었다. 모든 게 영남 형 발상이었다.

    영남 형은 돈이 생기면 지갑에 넣지 않고 주머니 여기저기에 쑤셔 넣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늘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쑤셔 봤다. 텔레비전에 출연, '딜라일라'를 불러 일약 스타가 돼 한창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형은 불광동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종종 집에 놀러 가 같이 방바닥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곤 했다. 하루는 나물 팔러 다니는 아줌마가 집에 왔다. 밖에서 영남 형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아줌마가 "한 단에 300원은 주셔야 한다"고 하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 좀 깎아줘요. 그럼 1000원에 석 단 주세요."

    뭔가 이상했다. "어머님 셈이 이상하지 않아?" 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뭐가 이상하냐"고 외려 내게 되물었다. 그만큼 모자가 셈에 능하지 않은 가족 같았다.

    1970년 형은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 무대에 게스트로 섰다. 미국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오를 만큼 인기가 많았던 걸 그룹 공연인지라 고위 관리도 많이 찾은 자리였다. 여기서 형은 '신고산 타령' 가사를 즉석에서 바꿔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라고 불렀다. 서울 와우아파트가 입주 20여일 만에 무너져 33명이 사망한 사건을 암시하는 노래였다. 영남 형은 '괘씸죄'에 걸려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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