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나를 한국에 있게 한 것은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 편지 한통

조선일보
입력 2011.10.28 03:13

교인 3000명 한국 정교회의 '영적 아버지' 소티리오스 대주교
그리스의 친구들은 내가 오래 산 게 기적이라는데 김치와 된장찌개 덕분일까요, 고난 속 살아남은 한국정교회…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 소년은 '타잔과 치타 같은 동물 친구들을 만나러' 아프리카로 가고 싶었다. 사제의 길을 걸으며 꿈꾼 곳이 아프리카였다. 하지만 그가 정착한 곳은 생소하고 가난했던 1975년의 한국이었다. 올해로 한국 생활 36년째. 한국 정교회 소티리오스 트람바스(83) 대주교는 그간 한국에서 성당과 소성당 14개를 짓고, 수도원을 열고, 신학교를 운영했다. 지금 그는 한국 정교인들의 '영적 아버지'이다.

2008년 은퇴한 뒤 머물고 있는 경기 가평의 구세주변모수도원에서 그를 만났다. "1975년 아테네 대주교좌성당 주임사제로 있을 때 한국 정교인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어요.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와 같습니다'. 초라한 한복 차림의 아이들이 꽃밭에 서 있는 사진도 있었죠. 아이들이 모두 꽃 같은데, 이런 아이들이 방치돼 있다니…. 편지와 사진을 붙들고 밤새 울었지요." 한국정교회는 원래 공산화로 초토화된 러시아 정교회 관할이었고, 당시 세계 정교회에서는 잊혀진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소티리오스 신부는 한국행을 자원했다. 그해 12월 김포공항에 내렸다. 처음에는 3년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제가 워낙 몸이 약해 가족들은 뜯어 말렸어요. 친한 친구는 '석 달을 못 버티고 돌아올 것'이라 장담했죠. 그리스 친구들은 제가 이렇게 오래 산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요. 고사리와 더덕, 김치와 된장찌개를 많이 먹은 덕일까요? 다 주님의 축복이지요."

당시 교인 50여명의 정교회 성당에선 주일 헌금액이 1700원 정도였다. 한강에 다리가 세 개뿐이던 시절 성당에는 러시아어를 거칠게 한국말로 옮긴 전례서가 딱 세 권 있었다.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그래도 필요한 만큼 하느님께서 꼭꼭 채워주셨다"고 했다. 부산, 인천, 전주…. 어렵게 정교회 성당을 세워나갔다. 그는 1993년 주교가 됐고, 2004년에는 한국 정교회 대교구 승격과 함께 초대 대교구장이자 대주교로 착좌했다.

‘타잔과 동물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던 그리스 소년은 한국에서 36년을 보내며 여든을 넘긴 노(老)대주교가 됐다.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경기도 가평 구세주변모수도원 내 성당에서 지성소 문을 열고 초에 불을 밝히고 있다.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대주교는 "한국인은 첫인상으론 감정 표현을 활발하게 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진짜 기쁨과 슬픔은 잘 드러내지 않는 속이 깊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한 번은 뺨에 눈물 자국이 있는 한 고등학생이 정교회를 찾아왔어요. 성당 열쇠를 받아가 혼자서 기도를 하는데, 알고 보니 아침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였어요. 그리스 젊은이라면 소리 내 울면서 다 털어놨을 텐데…."

대주교는 "한국에서 힘들 때면 바울로(개신교에서는 바울) 사도를 생각했다"고도 했다. 1985년 처음 구입한 코란도 차를 몰고 전국을 누비며 험한 길들을 짚어 갈 땐 더 힘들게 걸어 다녔던 바울로 사도를 떠올렸다. "바울로 사도는 탄압과 핍박, 돌팔매와 채찍질을 당한 흉터투성이의 몸을 자랑스러워했죠.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대주교는 최근 바울로 사도의 선교 여정 답사기 '위대한 선교사 성 사도 바울로'(정교회출판사)도 펴냈다. 그동안 수많은 전례와 교리서, 정교회 관련 책을 한국어로 엮어냈지만 한 번도 자기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낸 책이다.

현재 한국정교회 한국인 교인은 약 3000명. 작년에 선교 110주년을 맞은 정교회 역사를 생각하면 적은 수다. "러일전쟁, 일제시대, 6·25전쟁 등을 거치며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은 끊임없이 탄압받고 추방당했죠. 6·25 때는 한국인 정교회 신부가 납북돼 생사를 모르고요. 정교회가 한국에 살아남은 자체가 기적이죠."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요즘은 가평수도원에 신학교와 기숙사 문을 다시 열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인 자체가 빛이 되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그리스 아토스 성산(聖山)의 수도원 방문객들이 수도자의 삶을 보고 신앙을 고백하듯 우리가 더 작아지고 하느님의 종으로 충실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 정교회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동유럽·러시아 등에서 발전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 초대 교회의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세계 신자 수는 약 3억명. 성탄절보다 부활절을 중시, 부활절 이전 40일(사순절)뿐 아니라 부활절 뒤 40일을 따로 거룩하게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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