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책상, 내 아이디어야. 우와 신기해." 5학년 연호(11)가 들떠서 반원 모양 탁자를 가리켰다. 두 개를 마주 붙이면 원 모양이, 옆으로 이어 붙이면 구불구불 긴 탁자가 되는 책상이다. 같은 학년 친구 효경이(11)는 자기들만의 비밀 공간이라도 생긴 듯 팔짝 뛰며 2층 다락방으로 향했다. "여기서 친구들하고 엎드려서 책 보면 재밌을 거 같아요."

25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면온초등학교. 전교생 156명인 작은 시골학교가 들썩였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리모델링한 도서관이 문을 여는 날. 교사도 아이들도 상기됐다.

건축가 고기웅씨와 학생들이 함께 만든 강원 평창 면온초등학교 도서관. 왼쪽으로 아이들이 숨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동굴처럼 파인 공간이 눈에 띈다.

새 도서관의 문이 열리자 탄성이 쏟아졌다. 교실 두 개만한 아담한 공간에 구석구석 흥미로운 디자인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걸터앉을 수 있게 폭신한 직육면체 매트를 쌓아올려 작은 층층 계단을 만들었다. '매트 계단' 옆엔 미끄럼틀이 설치돼 딱딱한 도서관이 놀이터처럼 바뀌었다. 동굴처럼 푹 파여 아이들이 숨어서 놀 수 있는 곳도 있다.

도서관은 건축가 고기웅(37·고기웅 사무소 대표)씨가 디자인 디렉터를 맡아 학생과 학부모, 교사의 의견을 수렴해 만든 '합작품'.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펼치고 있는 '문화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프로젝트이다.

이소진씨가 설계한 부산 신선초등학교 도서카페(사진 위). 창틀을 평상처럼 넓게 만들어 학생들이 밖을 내다보며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김선현씨가 디자인한 전주 풍남초등학교 문화쉼터(사진 아래). 복도와 교실 사이의 벽 일부를 뚫어 놀이터처럼 만들었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공간의 주인인 학생들이었다. '건축주'가 된 아이들은 건축가와 지난 5월부터 세 차례 워크숍을 하면서 공간의 얼개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무한상상력을 발휘해 자신들이 갖고 싶은 도서관의 모습을 쏟아냈다. '누워서 책 읽을 수 있는 곳'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도서관' '미끄럼틀을 타고 놀 수 있는 곳' '몰래 숨을 수 있는 다락방'….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건축가와 함께 모형도 만들어 봤다. 자연스레 살아 있는 건축 수업이 이뤄진 셈이다.

날것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설계로 옮기는 것은 고기웅씨의 몫이었다. 고씨는 '해우재' '판교주택'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젊은 건축가이다. 그는 문화부가 지원한 5000만원(디자인비 1000만원 포함)의 예산을 쥐어짜내 다락방, 미끄럼틀, 층층 계단을 현실화했다. 고씨는 "규모는 작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조촐한 축하 행사에선 건축가,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주인공이 돼 떡을 썰었다. 김회억 면온초 교장은 "그동안 심미적인 인성을 길러내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는가 반성해본다"며 "아름다운 교실에서 진정한 문화 교육이 이뤄질 것 같다"고 했다.

이 학교를 비롯해 올해 전국 9개 학교가 '문화로 행복한 학교 만들기' 사업을 통해 '디자인 입은 교실'을 갖게 됐다. 부산 신선초등학교는 건축가 이소진(아뜰리에리옹서울 대표)씨가 참여해 평상을 적용한 도서 카페를 만들었다. "책은 왜 꼭 책상에 앉아서만 봐야 하느냐"는 아이들의 엉뚱한 발상에서 착안해 계단 모양 평상을 도서관에 뒀다. 건축가 김선현(디림건축사사무소 대표)씨가 참여한 전주 풍남초등학교는 '감성적인 놀이 공간'을 주제로 복도와 교실 사이에 빨강·연두·파랑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깔의 벽을 만들었다. 문화부 디자인공간문화과 정향미 과장은 "문화가 담긴 공간에서 아이들이 꿈의 씨앗을 틔울 수 있도록 디자인 교실을 늘릴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