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반도의 미래를 논하라, 그들처럼

조선일보
  • 김기철 기자
    입력 2011.10.22 03:04

    역사 속의 젊은 그들
    하영선 지음|을유문화사|400쪽|1만5000원

    1931년 춘원 이광수가 잡지 '동광' 대담에서 구한말 개화파 주역이던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물었다. 박영효는 "신사상은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진 순간이었다.

    1870년대 중반 박규수(1807~1877)의 사랑방에는 김옥균·홍영식·서광범·박영효·유길준·김윤식·김홍집·어윤중 등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평안도 관찰사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수습했고,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을 주도한 60대 후반의 박규수는 청나라 지식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와 '연암집'을 건네줬다. 이들은 전통적 중화 질서에 편입돼 있던 조선이 신흥 세력 일본과 새로운 문명 표준으로 등장한 서구에 맞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다.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서울대 교수가 박규수를 불러낸 이유는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미·일·러·중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남북한으로 나뉘어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18세기 북학파 박지원에서 출발, 다산 정약용을 거쳐 개화기 박규수와 유길준, 식민지 시기 김양수와 안재홍, 해방 이후 이용희까지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대표적 지식인들의 지적(知的) 고민과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시각에서 풀어낸다. 말세(末世·박지원) 또는 국망(國亡·정약용)이라는 위기 의식 아래 당대 현안과 치열하게 씨름한 지식인들이다.

    하 교수는 우선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중국 읽기에 주목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오랑캐라고 깔봤지만 청은 18세기 GDP 세계 1위에 올랐던 제국이었다. 청의 실력을 배워야 한다는 현실론을 받아들인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년들의 머리를 깎아 변발을 만들고 중국에 유학 보내 선진 지식을 배우는 한편, 장사꾼들이 자유롭게 중국과 무역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청을 정벌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청의 중심 세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쌓아 천하를 호령하는 방안이 어떻겠느냐고도 했다. 대청(對淸) 외교의 핵심으로 소프트 파워와 네트워크 외교를 통해 청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비현실적 북벌론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지식층엔 눈이 뒤집힐 만큼 급진적인 해결책이었다.

    유길준(1856~1914)은 중국이나 일본 또는 서양에 맞서 조선식(式) 문명 개화를 고민했던 지식인이었다. 그가 1880년대 조선의 외교전략으로 내건 '양절체제론(兩截體制論)'은 중국과는 전통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 및 서양 여러 나라와도 평등한 근대 국제관계를 새롭게 확립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양절체제론'을 복합 그물망 외교의 출발로 높이 평가한다.

    이 책에서 가장 생소한 인물은 1920년대 조선·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김양수(1896~1971)일 것이다. 그에 대한 논문 한 편 제대로 없지만 하 교수는 식민지 시기 가장 높은 국제정치적 안목을 가졌던 지식인으로 꼽는다. 김양수는 당시 영국과 일본의 주류 담론이었던 국제협조주의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1922년 워싱턴회의가 세력 균형이 아니라 미·일 간의 각축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20년 전에 이미 예리하게 지적했다. 김양수의 국제정치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면 193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정세에 대한 판단 착오로 좌·우 지식인들이 전향하는 사태는 막을 수도 있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한국인을 위한 국제정치학을 고민한 동주 이용희에 이어 저자는 남북한과 동아시아, 지구, 사이버 공간 그리고 국내 네트워크를 촘촘히 연결하는 그물망을 효과적으로 쳐서 복합적 시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를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19세기 말 국제 질서를 잘못 읽어 나라를 잃었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반성이다.

    이 책에 소개된 '젊은 그들'은 당시 시대를 주도한 국내외 정치 세력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해 현실에서 실패했다. 책의 모태는 하 교수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인데, 학교 밖 강연 자체가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시도한 실천인 셈이다. 대중 강연을 고쳐 쓴 이야기체 구성 덕분에 가볍지 않은 내용이지만 쉽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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