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독재자의 최후] '왕중왕' 자처했던 독재자, 마지막엔 목숨을 구걸했다

조선일보
  • 이한수 기자
    입력 2011.10.21 03:20

    카다피 집권서 최후까지
    27세때 쿠데타로 정권 잡고 反서구 선봉 역할
    자처하며 팬암기 폭파 등 테러 자행
    서방선 "중동의 미친개" 별명

    청년 카다피 - 카다피는 27세 청년이던 1969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세계 최장 철권통치를 휘두르다 지난 2월 시작된 리비아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수도 트리폴리를 내주고 잠적했던 무아마르 카다피(69) 전 국가원수가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았다.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는 카다피가 시르테 근처에서 생포됐으며 체포 당시 입은 부상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20일 밝혔다.

    42년 독재자 고향에서 최후

    42년 카다피 시대는 지난 2월 15일 동부 벵가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 8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2년 6월 7일 리비아 중부 지중해 연안 도시 시르테에서 태어난 카다피는 벵가지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다 군에 투신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을 본보기로 삼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27세 육군 대위 때인 1969년 9월 1일 벵가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세웠다. 그는 당시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치료차 터키를 방문한 사이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 직후 장군으로 진급하라는 권유에 그는 "리비아군은 국민의 지휘만을 받는다"면서 '대령'에서 진급을 멈췄다.

    카다피는 정권을 잡은 후 쿠데타 동지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1인 체제를 구축했다. 자기 부족인 카다파족을 중심으로 정권 기반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응징했다. 400억 배럴이 매장된 석유 자원은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국부(國富)를 통해 가족과 자신은 치부했지만 국민의 요구에는 귀를 닫았다. 당초 민주화 요구로 시작됐던 리비아 시위가 금세 내전 양상으로 확산된 것은 '42년간 피를 부른 철권통치'라는 배경 때문이었다.

    여성 경호원들 곁에 두고 카다피가 2010년 8월 이탈리아 로마 인근 공항에 도착해 군복 차림의 여성경호원들과 함께 비행기 트랩을 걸어 내려오고 있다. /AP
    反서구 선봉 "중동의 미친개"

    카다피는 집권 이후 반(反)서구의 선봉을 자처했다. 그는 1972년 미국·영국 등 서방에 맞서 이집트·시리아 등과 함께 전 세계 아랍 민족이 단결하는 단일 아랍국가 건설을 추구했으나 주변국의 호응이 약해 실패했다. 1975년에는 인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해 권력을 행사한다는 정치 이론을 담은 '그린북'을 통해 자기 정치 이론을 설파하고 1977년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1980년대에는 서구에 대한 테러리즘을 호소했다. 19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사건, 1988년 270명이 사망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 등 서방 세계에 대해 잇따른 테러를 벌여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2003년 이후에는 팬암기 사건 유족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며 서방과 유연한 관계를 갖기도 했으나 그는 국제사회에서 불편한 존재였다.

    독재자들과 함께 - 카다피(가운데)가 작년 10월 리비아 시르테에서 열린 제2회 아프리카아랍정상회의에서 호스니 무바라크(오른쪽) 이집트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왼쪽) 예멘 대통령의 어깨에 양팔을 걸친채 웃고 있다. /로이터
    2009년 처음 참석한 유엔 총회장에서 그는 당초 예정 시간 15분을 넘겨 90분간 연설하면서 서구는 식민주의의 대가로 아프리카에 72조7700억달러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를 '테러 이사회'라고 부르면서 유엔헌장을 찢기도 했다. 2009년 카타르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의에서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이라고 불러 빈축을 샀다.

    "나는 아프리카의 왕이다" -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전 국가원수가 작년 10월 수도 트리폴리에서 열린‘아프리카 국왕·술탄·왕자 등을 위한 두 번째 포럼’에 왕을 연상케 하는 복장에 왕관을 쓰고 참석해 두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
    집권 기간 중 최소 5차례 암살 위협을 받으며 일정한 곳에서 잠을 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카다피는 지난 8월 21일 트리폴리 함락 때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은신처로 고향 시르테와 사막 도시 사브하 등이 거론됐지만 두 달 가까이 그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중왕'을 자처했던 카다피는 나토의 무인기 공습과 NTC 시민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더 이상 숨거나 항전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키워드] 42년 독재자의 최후팬암기 폭파 테러h.chosun.com/search/news.search?query=%EC%B9%B4%EB%8B%A4%ED%94%BC+%EC%A0%95%EA%B6%8C+%EB%B6%95%EA%B4%B4&key" target=_blank>카다피 정권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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