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68] "단발한 여자는 후년(後年)에 대머리가 된다"

입력 2011.10.12 03:12

"이것(단발)을 본 여러 군중들은 물밀듯 모여들어 혼잡을 이루는 동시에, 그 해괴함을 놀내지 안이하는 이가 없섯다더라." 조선일보 1923년 3월 26일자에 실린 황해도 해주의 야학강습소 여교사 이춘봉(李春鳳)의 단발(斷髮)을 알리는 기사다.

남성도 제대로 단발을 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여성 단발은 '해괴한 사건'이었다. 1927년 별건곤 9호에 실린 단발여자의 계보(斷髮女譜)에 따르면, 1921년 기생 강향란이 처음 단발한 이래 단발 여성은 손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세상이 귀찮아 중이나 되겠다고' 단발했든(1924년 7월 21일자),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강제로 삭발을 시켰든(1923년 12월 13일자), 여성의 단발은 빠짐없이 기사로 소개됐다. 군산 기생 강산월(康山月)이 더 이상 '유산계급 노리개'를 할 수 없다며 단발했을 때는 박스기사로 크게 소개됐다.(1925년 3월 20일자)

1925년 당대의 여류 명사이자 '주의자(主義者)'인 주세죽(朱世竹) 허정숙(許貞淑) 김조이(金祚伊) 3명이 한꺼번에 단발을 감행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종래 제도의 구속을 타파하고, 부자연한 인습을 개혁'한다는 이유에서다.(1925년 8월 22일자) 이튿날자 조선일보 시평(時評)란은 "외국에 잇서서는 이미 진부한 사(事)"이나, "우리 조선에 잇서서 단행한 그 용기는 다대타"고 논평했다.

단발이‘간편 우미 경쾌하다’고 소개한 기사(1931년 7월 4일자·오른쪽)와,‘ 단발 녀자는 원숭이가 돼’라고 전한 외신기사.(1933년 2월 15일자)
그러나 세상은 '(사회)주의자'나 '기생'의 단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댐에 출가한 후에 남편이 술먹고 주정하면서 머리채 끄들며 때릴가 하야 예방주사로 깍어버렸소. …끌채를 안 잽히려거든 빤빤히 삭발하시야…"처럼 빈정거리거나(1925년 11월 7일자), '단발하면 후년(後年) 대머리(禿頭)가 된다'는 외신기사가 소개됐다.(1927년 5월 3일자)

1928년 잡지 별건곤 7월 1일자가 실시한 '내가 단발랑(斷髮娘)과 결혼한다면'이란 설문 결과도 비슷했다. "동부인 산보는 다녀도 머리를 기를 동안은 나란히 다니지 말 일" "속속히 뼈를 추려내 던지고 거룩한 녀왕님을 모셔야" "부모 명령은 거스를지언정 부인 명령은 신성불가침인 각오와 창자를 가져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답해, 단발 여자는 아내로서도 부적격이었다.

만주사변의 전운이 감돌던 1931년 들어, '낡은 것에 반항하라 간편 우미 경쾌하다'거나 '위생상, 경제상, 미관상 좋고, 세계 여자는 이미 단발을 했다'며 단발이 권해지기도 했다.(1931년 7월 4일자) 그럼에도 '수염을 깎으면 더 나는 것처럼, 단발하면 원숭이가 된다'거나(1933년 2월 15일자), "아직 조선 사람은 단발 녀자를 보면 이상하게도 서툴리 보기 때문에" 백화점원으론 뽑지 않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1936년 2월 16일자)

여성 단발을 자연스럽게 만든 것은 전시 동원체제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총동원체제에 돌입하자, 여학교를 중심으로 단발이 강요되거나 적극 권장됐다.(1938년 5월 6일자 등) '남자 대신 전차 운전수 노릇도 하고, 우편배달도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1939년 10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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