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30] 얌체 귀뚜라미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입력 : 2011.10.03 23:03 | 수정 : 2011.10.04 03:35

    날이 선선해지니 귀뚜라미 소리가 한결 청명하다. 초저녁부터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 수컷이 밤을 지새운다. 윗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좌우로 비벼 소리를 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육체노동이다. 그런데 실제로 야외에 나가 조사해보면 이처럼 10시간 넘게 소리를 내며 열심히 암컷을 부르는 수컷들이 있는가 하면 하룻밤에 30분도 채 울지 않는 수컷들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귀뚜라미 수컷으로 태어나 대통령이나 기업회장을 할 것도 아닌 주제에 그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어떻게 암컷을 유혹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겠다는 말인가?

    우리 인간의 콧구멍은 서로 너무 가까이 들러붙어 있어 냄새를 한 번만 맡아서는 그 냄새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코를 이쪽저쪽 들이밀며 킁킁대야 비로소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귓구멍은 얼굴 양옆에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해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대번에 알아낸다. 그러나 방향만 알 뿐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쓰고 계실 때 뒤에서 떠들며 장난친 학생을 적발하려 해도 방향은 알겠는데 정확히 누가 그랬는지 짚어내기 어렵다.

    채 30분도 울지 않는 귀뚜라미 수컷들은 청각 소통의 바로 이 약점을 이용한다. 10시간씩 열심히 소리를 내는 수컷 근처 풀숲에 숨어 있다가 그 성실하고 매력적인 수컷을 찾아오는 암컷 앞에 홀연히 나타나 마치 자기가 그 수컷인 양 행세하며 짝짓기에 성공하는 얌체들이 있다. 둘러보면 우리 인간사회에도 이런 얌체 수컷들이 심심찮다. 평생 남이 차려주는 밥상 주변을 맴돌며 달랑 숟가락만 올려놓고 사는 그런 사내들 말이다.

    암컷에 비해 수컷들이 대체로 훨씬 치사한 삶을 사는 데에는 그럴 만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 자기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암컷 주변에는 언제든 정자를 제공하려는 수컷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수컷은 아무리 잘났어도 암컷의 몸을 거치지 않고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수컷들은 암컷의 간택을 받기 위해 때론 치사한 삶도 불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컷으로 태어나 앞뒤 계산하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걷기란 그만큼 더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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