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65] "금시계·자개장 뽑자" 경품 행사장에 사람들 몰려

입력 2011.10.03 03:06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 이광수(李光洙)가 그린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이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

대규모 소비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1920~30년대 경품 행사는 손님을 끄는 단골 마케팅 기법이었다. 순수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잡화점(백화점의 전신)인 동아부인상회는 1921년 6월, 설립 1주년을 맞아 삼백원어치의 경품을 내건 할인 경품 행사를 개최했다. 재미를 봤는지 연말에는 경품 규모를 오백원으로 늘렸다.(조선일보 1921년 6월 19일, 12월 13일자) 경성뿐 아니라 전국에서, 시장이나 개별 상점은 물론 우(牛)시장, 약방, 유기점, 극장, 연초 등 물건을 파는 곳이면 어디나 '경품부(景品附) 대매출'이란 팻말을 내걸었다.

5000원 상당의 경품을 내건 북촌 상점들의 판매행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경품추첨장에 몰렸다.(1926년 12월 17일자 게재)

'요행'에 기대는 손님을 끌기 위한 경품 규모는 날로 커졌다. 1927년 경성시내 북촌 상점들이 내건 '세모(歲暮)연합대매출'은 5000원어치를 걸고, 1등 화류장부터 6등에 이르기까지 '공표'는 하나도 없다고 선전했다.(1927년 12월 13·17일자) 이듬해 종로 화평당 약방은 창립 35주년을 맞아 '조선인 사업계 처음으로' 1만원어치의 경품을 걸었고(1928년 5월 5일자), 그 해 말 종로 상인들은 '듯기만 하야도 끔찍끔찍한 오만개가 넘는 경품과 할인상품' 폭탄을 준비했다.(1928년 12월 15일자) 이듬해 조선박람회는 쌀 100가마와 자동차를 1등 경품으로 내걸었다.(1929년 9월 4일자) 사람들은 금시계 등 '대박'을 꿈꾸며 경품 행사장을 찾아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샀다.

말썽도 잦았다. 평안도 영변에서 열린 유기(鍮器)업자 경품 행사엔 무려 1만여명이 몰렸다. 그런데 수백명이 유기는 사지 않고 경품권만 사 경품대회에 참가했다가 걸려 큰 소동을 빚었다.(1925년 5월 12일자) 추첨 때 속임수가 있었다고 항의하거나(1925년 12월 16일자), 위조 경품권으로 물건을 바꿔가다 적발되기도 했다.(1925년 10월 27일자)

뭐니 뭐니 해도 경품 행사의 백미는 백화점이었다. 1931년 등장한 화신백화점은 이듬해 증축 낙성 기념으로, 20평짜리 기와집 한 채(1등 1명)와 만몽(滿蒙) 시찰 여비 혹은 쌀 20가마(2등 2명), 금강산 탐승 여비 혹은 의거리(衣巨里) 3단장 1세트(3등 3명)를 내걸며, 경품 행사의 이목을 주도해 나갔다.(1932년 5월 11일자) 이후 도회지의 세모 풍경은 '오색의 네온이 불야성'을 이루는 가운데 '백화점 창두에 경품의 윙크!'로부터 시작됐다.(1936년 12월 12일자)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 체제로 전환되자 소비 억제의 일환으로 '투기적 사행심만 붓도다 주는 장사술'인 경품은 엄금됐다. 대신 '봉사 매출'이란 이름으로 물건을 살 때마다 일정액의 인환권을 주는 방식으로 대체됐다.(1938년 12월 4일자) 경품 행사는 광복 후 다시 등장, 기승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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