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 논설위원

9월 15일 전국 순환정전 사태는 전력거래소가 늦더위로 전력 수요가 치솟을 걸 예측 못해서 일어났다. 왜 그랬을까? 기상청은 매일 오전 5시와 오후 5시에 다음날 날씨를 예보한다. 14일에도 오전 5시엔 ‘15일 서울 낮 최고기온’을 31도로, 오후 5시엔 30도로 예보했다. 9월 중순치곤 이례적인 고온이다. 15일 실제 최고기온은 31.3도였고, 최대 전력수요는 6726만㎾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전력거래소가 예측한 15일의 최고 전력사용량은 6400만㎾밖에 안 됐다. 이건 전력거래소의 예측 기능이 추석명절 동안 ‘동작 그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전력거래소는 추석 연휴(10~13일) 하루 전인 9일 기상청으로부터 다음 1주일의 주간(週間)예보를 통보받았다. 주간예보는 문제의 15일 서울 최고기온을 28도로 내다봤다. 전력거래소는 주간예보를 토대로 15일의 최고 전력사용량을 6400만㎾로 잡았다. 전력거래소는 매일 오후 6시 다음날의 전력운용계획을 짜게 돼 있다. 정상이었다면 14일 오후 6시에 15일의 전력운용계획을 세우면서 ‘서울 최고기온 30도’라는 한 시간 전에 나온 기상청 자료를 활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전력거래소는 5일 전에 만든 운용계획을 그냥 써먹었다. 명절에 들어가면서 명절 기간과 연휴 뒤 이틀까지의 전력운용계획을 미리 짜놓고는 기상예측이 바뀌었는데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7월의 매일매일 최고기온 추이와 전력운용 상황을 대조해 봤다. 그랬더니 최고기온이 1도 움직일 때 최대 전력수요는 대략 100만㎾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력거래소가 14일의 기상청 예보를 활용하기만 했더라도 15일 ‘예비전력 24만㎾’ 상황으로 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5일의 순환정전으로 감춰져 있던 문제들이 드러났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 전력 설비예비율(발전설비 능력이 예상 최대전력수요를 웃도는 여유분)은 4.1%밖에 안 된다. 2003년 18%였다가 여기까지 곤두박질쳤다. 설비예비율은 내후년 3.7%까지 떨어진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전력수급 컨트롤타워가 명절이라고 곤한 잠에 빠져버리는 식이어서는 무슨 큰일을 겪더라도 겪고 말 수밖에 없다. 1994년 7~8월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전력수급이 한계선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여러 날 계속됐다. 당시 한전 사장이었던 이종훈씨는 “직원들이 소방호스로 터빈에 물을 뿌려 식혀가며 전기를 생산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공급 업무가 6개 발전회사와 전력거래소, 한전으로 분리돼 있어 1994년 같은 유기적 대처는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새겨들을 만한 지적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옛날의 돌격대 방식을 주문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시스템으로 대처해야 한다. 스마트그리드가 그 해답일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기 공급처인 발전소·송전망과 소비처인 가전제품·공장기계에 인공지능을 심어놓은 것이다. 그런 후 전기 수급상황에 따라 전기요금이 시시각각 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전기 소비량이 몰려 예비발전소를 돌려야 하는 때는 전기료가 저절로 비싸진다. 가전제품·공장기계에 달린 지능칩은 변화하는 가격에 반응해 전기료가 비싸지면 가동을 멈추거나 출력을 떨어뜨린다. 이런 시스템이 완성되면 최고 전력수요가 자동으로 조절돼 지난달 15일 같은 위기는 생길 수가 없다. 10년 이상 걸릴 일이지만, 그쪽이 갈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