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액으로 내는 요금 말고도 50만원이나 되는 돈을 '귀걸이' 아이템 장만하느라 쏟아부었습니다. 저 같은 성인이 이 정도인데 청소년들은 어떻겠습니까."
직장인 김모(39·서울 종로구)씨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 중독자다. 엔씨소프트(대표 김택진)가 개발한 이 게임은 한꺼번에 여러 명의 이용자(user)들이 특정 캐릭터를 맡아 참여하는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MMORPG)이다.
리니지에선 지난달 14일부터 오는 5일까지 1만원짜리 '귀걸이' 4개를 구입하면 캐릭터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김씨는 최근 이 아이템을 사느라 50만원을 날렸다. 일반 아이템과 달리 이 아이템은 능력을 높이려면 소위 '인챈트'(enchant·마법걸기)를 해야 했는데, '레벨'을 높이다 한 번만 실패해도 그때까지 쌓은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돼 있었다. 김씨는 "인챈트의 레벨이 9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한번 성공해도 다음 단계, 그다음 단계로 욕심을 부리다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며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의 '뽑기장수'한테 당할 때처럼 '마지막 한 판만 더…' 하다가 '꽝'이 되는 상황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중독성 강한 온라인 게임에서 현금을 받고 아이템을 판매하고, 여기에다 '고(高)보상'과 '실패'의 확률을 섞어 사행성이 짙은 '확률형 아이템'을 만들어도 되는 것일까. 리니지 홈페이지와 일부 포털 사이트 등에는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게임물등급위원회 등도 조사에 착수했다.
◆너도나도 '확률형 아이템'… 도박이나 마찬가지?
국내 온라인 게임업체들은 언젠가부터 아이템 현금 장사에 열중해오고 있다. 아이템 거래액은 해마다 증가해 지난해 국내 온라인 게임 시장 약 3조7000억원 중 아이템 거래액이 1조원을 차지하게 됐다. 특히 과거에는 아바타와 같은 꾸미기·치장형 아이템을 많이 팔았지만, 최근에는 구매 후 실제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일명 '상자형' '캡슐형' 아이템이 늘었다.
바로 이들 아이템이 높은 '보상'과 '실패'할 확률을 섞어 사행심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엔씨소프트 외에도 넥슨의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CJ E&M의 '프리우스', 네오플의 '던전앤파이터' 등 인기 게임 대부분이 확률형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템 하나하나는 소액으로 판매되지만, 이용자의 경쟁심을 자극해서 반복적인 구매와 베팅(사용)을 유도하고 있다. 게임 업계에선 "한 대형 게임업체가 이들 아이템 판매로 일주일 만에 50억원을 벌었다" "5월이 되면 어린이 대상 아이템 하루만 돌려도 6억원이 떨어진다" 등의 말이 나오고 있다.
리니지 게시판에는 "애초에 캐쉬템(현금 아이템)을 찍어내지 말았어야 하고, 인챈트는 적용하지 말고 상시적으로 팔았어야 한다" "백날 천날 캐쉬템 팔고 기존 아이템 쓰레기 만들어가면서 게임 운영해봐라, 나중에 유저 얼마나 남는지 보자" 등의 글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올라오고 있다. 이에 대해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확률형 아이템은 전체 게임에 포함된 여러 가지 재미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라며 "도박에서 말하는 확률과 게임의 로직에 따른 확률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게임 중독자들의 주머니를 노려라
온라인 게임의 경우 베팅에 따른 배당을 주거나, 우연히 결과가 나오면서 재산상의 이득이나 손실을 줄 때 '사행성 게임'으로 분류한다. 문제는 게임업체들이 '치고 빠지기'식으로 기간제 이벤트를 열기 때문에 적발이 어렵고 피해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 게임물등급위 전창준 부장은 "게임물의 내용 변경이 들어올 경우 재심사하는 데 22일이 걸리는데, 게임 회사들이 21일짜리 기간제 이벤트를 하면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게임회사들은 "확률형 아이템 판매는 사행성 이벤트가 아니라 마케팅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어느 식품업체가 500원짜리 빵 백만개 중에 하나 꼴로 10만원짜리 경품을 넣어 판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놓고 '게임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게임 업체의 한 관계자는 "실패 확률을 더 많이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을 내고 누구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나중에는 모든 캐릭터의 수준이 비슷비슷해지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진다"며 "게임 세상에서 '불평등'을 계속 만들어내기 위해선 누군가 능력자가 될 때 누군가는 능력을 잃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각종 아이템 판매가 일단 중독자를 만든 뒤 마약을 판매하는 '마약 비즈니스'와 뭐가 다르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임 업계 내부에서조차 결과적으로 충성도 높은 고객들의 이탈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게임 유저 숫자나 이용시간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게임회사들이 손쉽게 매출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은 (아이템 판매로) 기존 유저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라며 "결국 이 때문에 가장 로열티가 높은 충성 고객들이 떨어져 나가고 게임 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