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자기가 앓는 질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도서관에 가서 의학 도서 대출 신청을 했는데, 의사 면허증이 있어야 열람이 가능하다고 하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황당해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불과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공공 도서관에서는 일반인의 의학 도서 열람을 법으로 금지했다. 의학 지식이라는 것은 국가가 인정한 의료인만 알고 행해야지, 일반인이 섣불리 알았다가는 건강을 망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당시에는 그게 환자를 보호하는 조치였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나 의학 도서를 '금서(禁書)' 취급하지는 않는다. 되레 병원에서 일반인을 위한 의학 도서관을 개설할 정도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서점에 가도 널린 게 건강 서적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환자가 자기 병원 진료 기록(차트·Chart)을 들여다보는 일이 불가능했다. 이는 신성불가침의 영역과 병원에 대한 도전이었다. 환자들은 병원이 자기 상태를 어떻게 기록하고,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지를 의사의 눈과 입을 빌리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환자가 원하면 병원은 의무 기록을 반드시 내줘야 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이를 어기면 병원이 처벌받는다. 처방전 공개로 환자가 먹는 약물 이름을 알게 된 지는 10년이 채 안 됐다.
최근에는 아예 병원이 먼저 의무 기록을 보여주겠다는 곳도 생겼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제 의료기관 인증(JCI)을 받은 가메타병원에 가보면, 환자들이 마음대로 의무 기록을 무료로 복사해 갈 수 있도록 병원 로비에 프린터를 설치해 놨다. 환자 카드만 넣으면 모든 기록이 줄줄이 나온다. 뭐 숨길 것도 없는데 보고 싶으면 보라는 식이다. 환자들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이다.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대 부속병원이나 버몬트주 일부 병원은 환자 의무 기록을 인터넷 웹(web)에 올려놓는 시범 작업을 한다. 그러고는 환자들에게 보안 키(key)를 주고 차트를 언제든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는 이 보안 키를 갖고 이 의사 저 병원으로 돌아다니며 자기 병세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진료 기록이 보관된 곳이 병원뿐이어서 다니는 특정 병원에 환자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 돼간다.
약물에 대한 전문 정보는 의사와 약사, 제약회사의 고유 영역이었다. 환자는 그들에게 판단을 위임하여 약을 먹는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모든 약물 정보가 공개된다. 새로 개발되는 신약(新藥)의 효과도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된다. 'Patient like me'('나와 같은 병을 가진 환자'라는 뜻)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환자들이 약물과 각종 치료에 대한 경험을 올리고 평가하고 공유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와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는 이런 게 문제이고 불편하니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만들면 협조하겠다는 제안도 한다. 질병별로 환우회를 조직하여 건강보험 확대를 주장하는 곳도 나왔다.
과거 건강과 질병 관리는 전적으로 전문가에게 의존하고 위탁하는 방식이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형이었다. '전문가 의료'가 건강을 독점하는 구조였다. 동네 목욕탕에서 만난 이웃들이 전하는 경험담에 좌우되던 불확실성의 사회였다. 소문과 주변의 평판에 매달리던 '발품 정보' 시대였다. 정부 기관이나 보험회사가 짜 놓은 건강보험과 의료 서비스 구조에 따라가는 '순종형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건강관리는 의료 정보 확산으로 자기(自己) 주도형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다. 더욱이 고령 사회를 맞아 생활 방식과 생태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 만성질환이 질병의 다수를 이룬다. 여기에 환자들은 인터넷과 IT 기술로 무장하여 '반(半)'의사가 돼가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를 'Smart patient(똑똑한 환자)'라고 부른다.
예전에 의료라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루기 위험하여 의학 지식이 빈약한 일반 소비자(환자)들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똑똑한 환자'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환자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료 소비의 주체로 변하고 있다. 병원과 의료인, 정부(보험자)가 더욱 긴장해야 할 이유다. 일반 영역의 환자와 전문 영역인 의료의 관계가 일방적이고 종속적이었던 '헬스(health) 1.0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소통하고 보완하고 협력하는 '헬스 2.0 시대'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다. 독점적 자본가에게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던 카를 마르크스가 이 시대에 환자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이렇게 외칠 것이다. "만국의 환자들이여 궐기하라. 지금은 헬스 2.0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