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기 vs. 루벤스 "초상화로 한판 붙자"

조선일보
  • 허윤희 기자
    입력 2011.09.26 03:07

    '초상화의 비밀' 전 내일 개막… 조선·中·日·유럽 작품 망라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 魂까지 그려낸 조선 초상화는 서구 사실주의 뛰어넘는 성취

    전시장 한복판, 나란히 걸린 초상화 두 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보물 제1487호인 '서직수(1735~?) 초상'. 풍성한 백색 도포를 입고 서 있는 조선 선비의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표정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1796년 서직수가 62세 되던 해,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다. 빳빳한 목의 깃, 얌전하게 가슴에 묶은 검정 띠, 부드러우면서도 형체감을 잘 드러내는 의복의 윤곽선과 주름이 선비의 풍모를 보여준다.

    다른 그림은 바로크 거장 페터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한국인 초상'(미국 폴게티박물관 소장). 당초 이 인물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탈리아로 건너간 '안토니오 코레아'라 알려졌지만, 인상착의로 보아 에도시대 일본에 파견된 네덜란드의 자크 스펙스 무역관장이 발탁한 조선의 전직 관리였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그림 속 인물이 16세기 조선 관리들이 입던 철릭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린‘서직수 초상’(왼쪽·보물 제1487호)과 바로크 거장 루벤스가 그린‘한국인 초상’(오른쪽). 그림 속 인물이 서 있는 자세와 두 손을 모은 방식이 비슷하지만 표현 기법과 양식에서 차이가 난다. 입체적 음영이 돋보이는 루벤스 그림은 두 볼과 콧등, 입술에 붉은색을 칠해 생기를 불어넣었고, 조선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서양인 느낌이 난다. 반면 이명기 그림은 형형한 눈빛과 선비다운 풍모를 통해 인물의 내면까지 그려낸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이 27일 개막하는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에서 두 그림이 맞붙었다. 박물관이 지난해 개최해 국내외에서 호평받은 '고려불화대전'을 잇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로, 당대 최고 대가들인 이명기·김홍도·박동보·김희겸·채용신이 그린 국보급 초상화가 대거 출품됐다. 한국 초상화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유럽의 초상화까지 200여점이 전시돼 국제적 시각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다. 정조가 아끼던 신하들의 초상화첩(일본 덴리대도서관 소장)을 비롯해 해외에서 대여한 그림들은 모두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

    특히 나란히 걸린 이명기와 루벤스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의 표현양식과 기법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두 점 모두 조선시대 선비(관리)를 그린 전신입상(全身立像)이지만, 루벤스 그림은 입체적 음영이 도드라진 반면 '서직수 초상'은 평면적이다. 대신 내면의 세계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강조했다.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의 윤곽에는 고동색 선을 덧그려 깊이감을 주었고, 동공 주위에는 주황색을 넣어 형형한 눈빛을 표현했다.

    우리 역사에서 초상화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했던 시대는 조선왕조였다. 통치자로서 위엄 있는 왕, 의로운 일에 목숨 걸었던 충신,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선비들…. 주로 모범이 되는 역사 인물을 그려 넋을 기렸다.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고, 외모뿐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까지 그리고자 했다.

    보물 제931호 '태조 어진'(왼쪽),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가운데), 청나라 오보이 초상.
    전시는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보여주는 '어진(御眞)'으로 시작해 충신(忠臣)과 공신(功臣)들의 초상화로 이어진다. 정몽주, 이순신, 황희, 박문수, 오성과 한음 등 역사 속 위인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여성 충절의 상징인 논개와 계월향, 최연홍 등 여인들의 초상화도 한편에 걸렸다.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송시열과 허목 등 역사의 맞수들도 나란히 걸려 있어 초상화를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재미가 있다.

    한·중·일 초상화 비교도 흥미롭다. 17세기 초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교토대박물관 소장)은 앞마루에 한 쌍의 사자 모양 석상을 그리는 등 인물을 신격화했고,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어린 시절 8년 동안 섭정한 오보이(鼇拜)의 초상(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새클러미술관 소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김울림 학예연구관은 "조선의 초상화는 대륙적 스케일의 중국 초상화보다 겸손하고, 섬세한 분위기의 일본 초상화보다 절제돼 있다"며 "내면의 혼까지 드러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시각적 사실주의를 추구한 서구의 초상화를 뛰어넘는 위대한 성취"라고 했다.

    뒷면에 색을 칠해 앞면에 반투명 상태로 은은히 드러나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은 조선 초상화의 중요한 키워드. 전시 마지막에선 초상화 제작과정의 전모를 소개하고, X선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초상화의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그림의 실체도 공개한다. 공재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은 현재 얼굴만 남아 있지만 적외선 투시 결과 눈으로 보기 힘든 옷깃과 옷 주름 선이 어깨 부분에서 확인됐다. 전시는 11월 6일까지. (02)2077-9000
    초상화의 비밀.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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