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긴장시킨 '9·15 대정전 사태'의 위기는 넘겼지만, 블랙아웃(black out)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정전 사태의 직접 피해자인 753만가구(기업)뿐 아니라 피해를 비껴난 국민들 또한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 여전히 불안해한다. 공포의 뇌관 어느 것 하나도 제거된 게 없기 때문이다.
사태 당일 전력지휘부의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수뇌부의 공백과 직무태만, 허위보고, 책임 떠넘기기를 보노라면 과연 이곳이 정부가 있는 나라인가 의심스럽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대정전 사태 이후에도 최소 1시간은 아무것도 몰랐다. '전력사령관'이 단전(斷電) 사실을 몰랐던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그 바람에 사태의 조기복구 등 피해 최소화 대책은 실종됐다. 정전 지시를 내렸던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전력수급에 구멍이 뻥 뚫린 줄 알면서도 지인(知人)을 만나 호텔에서 식사하느라 2시간을 허비했고, 정전 당시에도 외부 인터뷰 등 딴전을 피웠다.
당국자들이 문제해결과 재발방지에 신경 쓰기는커녕 책임회피에만 혈안인 것 역시 공포의 뇌관이다. 한전관계자들은 "이번 사고는 과거 정부가 한전·자회사·전력거래소를 쪼개놓은 결과이며, 전력거래소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라는 괴(怪)문서를 요로에 뿌리는 중이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지적한 무차별 단전 피해에 대해서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다. "주파수, 전압 등을 고려해 내린 부득이한 결정"이라는 전력거래소의 주장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선(先)수습, 후(後)사퇴'를 밝혔지만 사태 발생 후 열흘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을 못 내놓는 지식경제부를 국민들이 어떻게 볼지 한번 되묻고 싶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업용 전력소비가 전체전력의 50%를 넘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따라서 단전(斷電)은 곧 국가경제의 블랙아웃으로 연결되는데,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된 전력 당국의 처사를 보면 기가 막힌다. 한전 매뉴얼인 '(단전 및 복구)대상 선로기준'에 따르면 대기업 생산기지의 전력은 끊어도 되지만, 관광호텔과 탄광의 전력은 끊어서는 안 된다. 연간 수십조원의 매출과 수출실적을 올리고, 몇 초의 정전에도 수백억원이 허공에 떠버리는 삼성전자 등 국가 중요생산시설이 관광호텔보다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국민이 납득할까. 더 한심한 것은 이 시대착오적인 선로기준 매뉴얼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제대로 아는 당국자가 없다는 점이다. "한전이 50년 전 설립됐을 때 만들고 지금까지 방치했을 것"이라는 괴담(怪談) 수준의 얘기만 맴돌 뿐이다.
지휘부는 공백이고, 관계기관들은 살아남으려고 면피(免避)에 혈안이다. 당국 간 손발은 맞지 않은 데다, 제대로 된 매뉴얼조차 없고, 나라경제를 책임지는 대기업 생산기지의 전력은 담당자들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다. 이런 현실이 9·15 대정전보다 더 무서운 공포다. 앞으로 언제, 얼마나 대정전 사태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부의 발전공급량 추이를 보면 전력설비예비율은 2013년 3.7%까지 떨어졌다가 2016년쯤 10%를 넘어선다. 그때가 돼야 전력부족이 다소 풀린다는 뜻인데, 그동안 우리는 4번의 여름과 5번의 겨울 등 9차례의 전력 피크시즌을 맞아야 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정부든, 공기업이든 공포의 뇌관들을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최소 9차례의 여름과 겨울은 공포의 계절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