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斷電] 평온한 오후, 암흑의 300分이 덮쳤다

    입력 : 2011.09.16 03:19 | 수정 : 2011.09.16 13:22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어요. 꼼짝하지 않는 깜깜한 승강기 안에 5명이 20분 넘게 갇혀 있었어요. 다섯 살짜리 아이가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고,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떨어져 버릴 것 같아 저도 겁에 질렸어요." (주부 박모씨·37·서울 성북구)

    15일 오후 예고 없이 시작된 전국적 단전 사태로 대한민국이 마비됐다. 이날 오후 3시쯤부터 곳곳에서 돌발적인 단전이 벌어지면서 도심 사무실과 상가, 공단의 소규모 공장, 야구장, 극장, 대형 마트, 쇼핑몰 등이 혼란에 빠졌다. 주요 병원들은 자체 비상 발전기를 가동,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갇혔어요" 944건 신고 폭주

    ▲이날 오후 3시 10분쯤 갑자기 단전이 시작되면서 서울 강남구와 영등포 일대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국 소방서의 119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까지 전국적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신고 전화가 944건에 달했다. 서울에서만 365건이었다.보험회사에서 근무하는 윤영수(41)씨는 "고객과 약속을 잡고 외근을 나가다 엘리베이터에서 30여분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불꺼진 신호등, 도로는 아수라장… 아빠 전화도 안터졌다

    신호등이 꺼져 도심의 차들이 뒤엉켰고, 기지국 전기 공급이 중단되며 일부 휴대전화도 먹통이 됐다. 서울 강남 주요 사거리, 영등포구 일대, 신대방동 등에서 신호등 250여개가 완전히 중단되거나 오작동해 교통 혼잡이 발생했다. 일부 지역에선 휴대전화도 불통됐다. 회사원 노모(57)씨는 "휴대폰을 사용하던 도중 수신 불능 메시지가 뜨면서 30분 넘게 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야구 경기장에 불이 꺼지면서 선수도 관중도 모두 당황했다. 15일 오후 목동에서 열린 프로야구 넥센-두산전에서 정전으로 경기가 중단되자 두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앉아 전기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김재현 기자 basser@sportschosun.com

    어둠 속의 야구장… 관중도 선수도 어리둥절

    오후 6시 30분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프로야구 경기는 시작 14분 만에 갑작스러운 단전으로 중단됐다. 1회 말 경기가 진행되던 중 모든 전기 시설이 멈췄고, 관중은 전기가 다시 들어온 오후 7시 50분까지 어두워져가는 관람석에 앉아있어야 했다. 김모(32)씨는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도 많은데 뻔히 경기하는 것 알면서 야구장 불까지 끄는 것은 너무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움직이는 무빙워크 급정지… 마트 간 엄마 큰일날 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를 찾은 시민들도 돌발적인 정전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충남 천안 신방동 홈플러스에서는 갑작스러운 단전으로 무빙워크(전동 도로)가 정지해 사고가 날 뻔했다는 시민 불만이 쏟아졌고, 한 트위터 사용자는 "서울의 한 이마트가 급단전돼서 직원들이 뛰어다니고 난리 났음"이라는 글을 올렸다.

    "지갑에 돈도 없는데…" 속 터지는 현금인출기

    농협 전국 221개 지점의 현금자동입출금기 작동이 일시 중단됐다가 복구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융권 전산망은 곧 복구돼 고객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서울 중구 신한은행 청계지점에선 오후 3시 40분부터 20분간 정전이 되자 비상 전력을 이용해 현금인출기 4대 중 2대를 긴급하게 가동했다. 그러나 전산 입력이 불가능해 상당수의 고객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영화보다 웬 날벼락… "비상구가 어디예요?"

    극장에서도 단전이 발생했다. 대부분은 비상 전력으로 가까스로 영화 상영을 이어나갔지만, 비상 전력이 없는 곳은 환불 소동까지 빚어졌다. 트위터 아이디 'Agata0719'씨는 "엄마랑 같이 영화관에 갔는데 끝나기 30분 전에 단전 사태가 발생…. 영문도 모르는 엄마와 나는 갈팡질팡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음"이라는 글을 올렸다.

    강원도 강릉시의 양식장 ‘한동수산’에서는 수조로 산소 공급이 중단돼 기르던 광어가 집단폐사했다. 한동수산 관계자가 폐사한 광어를 건져내고 있다. /강릉=김지환 객원기자 nrd1944@chosun.com

    광어의 비극… 양식장 물고기 집단폐사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의 한동수산 양식장에서는 이날 오후 4시쯤부터 30분간 전기가 끊기면서 직경 7.5m 크기의 원형 수조 9개에서 기르던 광어 1만5000마리 정도가 집단 폐사했다.

    유동근(54)사장은 "단전이 된다고 미리 알려줬으면 대책을 마련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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