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적이 헐어주시려는가…."
26일 경주 분황사 보광전(普光殿) 북쪽 벽 앞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 60여명이 한양대 고운기 교수의 선창으로 신라 향가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를 낭송했다. "1300여년 전 다섯 살 눈먼 자식의 손을 잡은 엄마 희명(希明)은 지금은 사라진 분황사 전각 북벽의 천수관음 그림 앞으로 다가가 아이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어요. 세상을 두루 보고 구제하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 '그 많은 눈 중에 하나만이라도 딸에게 달라'는 어미의 절규가 보살의 마음에 가닿았던 것일까요. 삼국유사 기록 속에서 딸은 노래의 힘으로 다시 앞을 보게 됩니다."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공동 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이 26~27일 '이야기 창고 삼국유사를 만나다'를 주제로 경북 경주와 군위 일대를 걸었다. 절집에 섬돌 하나, 길가에 나무 하나마다 부처와 인간, 왕과 여인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땅이다.
호국룡이 살았다는 우물을 살피고, 국보 30호 모전석탑을 돌아 분황사 밖으로 나갔다. 멀리 경주 남산이 보이는 너른 들판에 활짝 핀 노란 코스모스가 물결쳤다. 고려의 39년 질긴 항쟁에 질려버린 몽고가 '호국 불교'의 싹을 자르려 불살라버린 황룡사(黃龍寺) 터다. 고 교수와 계명대 이종문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황룡사에는 인도 아소카왕이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쇠로 단박에 만들었다는 장륙존상(丈六尊像·사람 키의 두 배인 1장 6척 높이 불상), 무게가 80t에 달하는 범종, 그리고 높이가 약 80m인 것으로 추정되는 9층탑이 있었습니다. 진흥왕이 황룡사를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신라는 옛 약소국이 아닌 '진짜 신라'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범종은 본국으로 가져가려던 몽고군의 배가 뒤집히면서 대왕암 앞바다에 잠들었다는 전설로만 남았고, 황룡사탑과 장륙존상은 그 주춧돌 흔적뿐이다.
다음날인 27일 경주 안강 흥덕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가지를 뻗은 소나무 숲을 만났다. 소나무 사진가 배병우의 사진들로 익숙해진 풍경, 잔뜩 습기를 품어 폭신폭신한 숲길엔 발을 옮길 때마다 방아깨비며 개구리 따위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이곳에는 흥덕왕과 왕비 장화 부인의 애달픈 순애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즉위 직후 아내를 잃은 흥덕왕이 앵무새 한 쌍을 선물받았는데 암놈이 먼저 죽어버렸다. 수놈은 매일 처량하게 흐느껴 울었다. 보다 못해 수놈 앞에 거울을 세워주자 처음엔 부리를 맞대며 좋아했지만 결국 그것이 제 짝이 아님을 깨닫고는 죽어버리고 만다.
흥덕왕은 새 왕비를 맞으라는 신하들에게 "한 마리 새도 제 짝을 잃고 저리 슬퍼했는데 내가 사람으로서 어찌 새 왕비를 맞겠는가"라며 거절했다. 시녀조차 곁에 두지 않은 채 10년을 더 살다가 그리던 아내의 묘에 함께 묻혔다. 이종문 교수는 "이런 사연 때문에 예부터 부부 간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흥덕왕릉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팔공산 거조암(居祖庵) 영산전에서는 오백 나한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수는 "어떤 얼굴은 봄풀처럼 연약하고, 어떤 얼굴은 추풍낙엽처럼 낙심해 있다. 절대침묵에 빠진 얼굴도, 천둥처럼 소리치는 얼굴도, 웃고 우는 얼굴도 모두 들어 있다"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500여명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지금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인지 한번 찾아보시라"고 했다.
군위 삼존석불(三尊石佛)을 거쳐 도달한 여정의 마지막은 인각사(麟角寺). 고려 말 보각국사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사찰이다. 주지 도권 스님은 "인각사는 임진왜란 때 화약제조창이었다는 이유로 정유재란 때 왜군이 파괴했고, 그 뒤 중창됐지만 단 한 번도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말에는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과 학자들이 나서 겨우 지켜냈다"고 했다. 보각국사 부도탑은 부조가 닳아 희미해졌고, 비석은 탁본으로 학대당하다 원 형체를 알 수 없을 만치 파괴돼 있었다. 결국 세월이 흘러 뒤에 남은 것은 세상을 떨게 한 권력도,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 건물도 아니었다.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