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문학산책] 이 세상에 없어서 아쉬운 사람, 이문구

조선일보
  • 박해현 논설위원
  • 이철원
    입력 2011.08.25 23:33

    70년대 청진동 뒷골목은 文人들의 사랑방
    소설가 이문구는 ‘청진동 시대’의 구심점
    문학과 인품, 주량 모두 글쟁이들의 존경받아
    60~70대 문인들은 지금도 세상 떠난 그를 그리워해

    박해현 논설위원
    1970년대 서울 청진동 뒷골목은 '문학동네'였다. 출판사와 잡지사가 몰려 있었고, 소설가 천승세가 운영하는 기원(棋院)도 있었기에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글쟁이들은 뒷골목 주점에서 술타령, 말타령, 글타령을 하면서 한세월을 보냈다. 주머니 형편이 넉넉지 않은 문인들은 된장찌개를 안주 삼아 마시다가, 바닥이 나면 김치와 깍두기를 주섬주섬 집어넣고 맹물을 타서 끓여 먹었다. 앉은자리에서 삼탕(三湯)까지 해도 주인이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천상병 시인은 술집을 기웃거리면서 동료들이 건네는 술잔을 받다가 푼돈도 얻어 썼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고은 시인은 단골 술집을 아예 여인숙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연보(年譜)를 쓰면서 '1975년 1년 동안 소주 1000병 통음(痛飮)'이라고 적었다.

    청진동 시대를 기억하는 문인들은 지금도 때때로 과거를 떠올리면서 소설가 이문구(1941~2003)를 그리워한다. 이문구는 청진동에서 소설가 김동리가 창간한 월간 '한국문학'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는 약 1000명의 문인들을 속속들이 알고 지냈다. 문인이 상(喪)을 당하면 늘 이문구가 나타났다.

    이문구는 인품과 주량(酒量)뿐 아니라 글솜씨로도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익힌 한학(漢學)의 향취가 밴 산문,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에 해학이 가득 담긴 소설, 해맑은 감수성으로 빚어낸 동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의 숲을 이뤘다. 이문구는 청진동 시절에 만난 문인 21명과의 인연을 맛깔스런 글로 기록했다. 주로 문예지에 발표한 인물소묘(素描)들이다. 아깝게도 절판됐다가 최근 '이문구의 문인기행'이란 새 제목으로 다시 출간됐다.

    언젠가 이문구와 함께 그의 고향인 충남 보령에 간 적이 있다. 그는 기차 안에서 1970년대 문단야사(野史)를 느릿느릿하면서도 익살스럽게 들려줬다. '이문구의 문인기행'을 펼치니 그때 그의 음성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내가 아는 청진동 시대의 뒷이야기는 팔할이 이문구가 들려주었거나 글로 써놓은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문구가 가까이했던 선배 문인 중에 시인 박용래가 있다. 심약하고 섬세한 박용래는 작고 미세한 것들 앞에서 감동을 받아 눈물을 자주 흘렸다. 이문구는 박용래를 가리켜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고 묘사했다. 은행원과 교사를 지냈지만 시골에서 시만 썼던 박용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술을 끊겠다고 선언하면서 집안에 있던 술잔과 그릇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면 그는 다시 술을 입에 댔고, 다음날 아침 또 금주(禁酒) 선언을 했다. 언제가 그가 스무날 동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날 너무 기뻐서 축하주를 마셨다. 술잔과 그릇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자 그는 접시에 술을 따라 마셨다고 한다.

    이문구 역시 술을 가까이하다가 속이 탈 나서 한동안 끊은 적이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실천문학사를 운영하면서 친일문학선집을 냈는데, 스승인 서정주 시인의 친일시(親日詩)를 넣고는 괴로워했다. 그는 스승의 얼굴 보기가 두려워 피해 다녔다. 어느 날 서정주가 이문구를 우연히 만나 화를 내기는커녕 반가워하면서 "너는 왜 요새 잘 보이지 않느냐"고 했다. 이문구는 속병을 핑계로 댔다. 서정주는 "어서 속 고쳐 가지고 오너라. 아아, 우리는 어이튼 한잔해야 허거든!"이라고 했다. 그는 2000년 서정주가 세상을 뜨자 그 영전에 술 한 잔 올리면서 눈물을 삼켰다.

    이문구를 그리워하는 문인이라면 신경림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신경림도 몇 해 전 청진동 시절을 회상한 책을 내면서 이문구 얘기를 꺼냈다.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자 문인들끼리 항의시위를 하자고 했다. 그 자리에서 이문구만 "모두 다 잡혀갈 게 뻔하다"며 반대했다. 다음날 열변을 토하던 작가들은 겁이 나서 일부러 늦게 시위장소에 나타났는데, 이문구 혼자 제시간에 나와 피켓을 들고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 "동시대에 같이 활동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이문구 선생을 꼽고 싶다"며 "그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참 아쉽다"고 했다. 누구나 세상을 뜨지만, 아쉬움을 이 세상만큼 크게 남기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문구는 사라진 '청진동 시대'의 사람 냄새 나는 세상 그 자체였기에 그의 부재(不在)로 인한 공허감은 뒤에 남은 글쟁이들 가슴에서 하염없이 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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