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가 쓰나미라면 지금은 강도 높은 여진 정도
3000억달러 넘는 외환보유액이 이번 충격을 막아주는 쿠션 역할

선진국 채권 수익률 너무 낮아 안정적인 자산에 투자 집중할수록
국민연금 재정 오히려 불안정해져… 주식·부동산 등 다양한 투자 필요

과거 국민연금은 연못에 사는 고래, 국내에서만 장사하다가는
고래도 연못 생태계도 모두 죽어… 글로벌 금융시장 적극 공략해야

"증시에서 바닥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국민연금은 저가(低價) 매수의 타이밍에 언제든지 들어갈 준비가 돼 있고, 실탄(자금)도 충분합니다."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현재 시장 상황과 연간 투자 계획을 감안할 때 올 연말까지 국내 주식시장에 신규로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은 약 10조원가량"이라고 밝혔다. 올 들어 지금까지 주식시장에 쏟아부은 4조~5조원의 2배에 이르는 규모다. 국민연금이 연말까지 증시에 투입할 자금 규모를 처음 공개한 그는 "필요하면 투자금 확대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증시가 6% 폭락한 지난 19일 오후 서울 충무로 국민연금빌딩 22층 접견실에서 만난 전광우 이사장은 이날의 증시 폭락에 대해 '패니키한(공황) 상태'라고 진단하면서도 "내주 초에 여진(餘震)을 봐야겠지만 장기 투자자인 국민연금은 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말 현재 적립금 규모가 34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과 채권에 34조8000억원을 투자한 '글로벌 큰손'이기도 하다. 골드만삭스·씨티그룹·블랙스톤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과 펀드 CEO(최고경영자)들이 수시로 그를 찾아온다. 그는 인터뷰 전날 같은 자리에서 골드만삭스의 마이클 에반스 부회장 겸 아시아 회장을 만났다. 22일 오후에는 마크 모비우스 템플턴자산운용 회장이 찾아올 예정이다. 아마 그는 국내에서 선진국 금융시장 동향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입수할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 19일 서울 충무로 국민연금빌딩 22층 접견실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2008년 리먼 쇼크가 대형 쓰나미라면 이번 위기는 강도 높은 여진 수준”이라며“국민연금은 저가 매수의 타이밍에 적극적으로 주식시장에 들어갈 여유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그는 최근 전 세계 금융시장이 들썩이는 사태에 대해 "금융시장에 핵폭탄이 떨어졌던 3년 전 리먼 사태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대형 쓰나미였다면 지금은 강도 높은 여진(餘震)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2008년에는 우리나라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이 '더블 펀치'를 맞았지만, 지금은 외환시장이 잘 버텨주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3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이 이번 충격을 막아주는 쿠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신규 투입 자금이 10조원이라고 하는 근거는?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주식 투자 비중 목표치를 18±3%(15~21%)로 세웠는데, 지난 6월 말 17.8%로 떨어졌고, 최근 주가가 떨어지는 바람에 주식을 팔지 않았는데도 비중이 더 낮아졌다. 이를 연말까지 18%까지 끌어올리면 대략 10조원 정도의 추가 투자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주식투자비중을 21%까지 늘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규정 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무작정 돈을 퍼부어 시장이 (국민연금에) 너무 기대게 해서도 곤란하므로 그 말은 하지 않겠다. 시장도 자정(自淨) 기능이 있어야 한다. 폭풍이 와서 쓸어낼 것은 쓸어내고, 떨어질 것은 떨어져야 거래가 제대로 이뤄진다."

―선진국 투자은행과 헤지펀드 CEO를 많이 만나는데, 최근 그들의 말에서 공통점은?

"2008년 위기가 응급처치가 필요한 급성 질환이라면, 현재 재정 적자는 만성 질환이어서 단시간 내에 해결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요약해 달라.

"유럽 사태는 시간을 끌면서 지구전으로 가는 것 같다. 빨리 해결되기 힘들다. 반면 미국은 신용등급이 하락했지만 노출된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도 같은 얘기를 하더라.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디폴트(국가 부도) 위험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프랑스보다 미국 신용등급이 낮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번 사태는 미국 신용등급 하락에서 촉발됐지만, 시장에선 유럽 재정 적자가 더 부각되고 있다. 최근에는 유럽계 은행들의 자금 경색이 이슈가 되고 있다. 오늘 새벽에 국민연금 뉴욕 사무소에서 '유럽계 중소 은행들의 신용 경색이 감지된다'는 보고서가 왔다."

―어제 만난 에반스 골드만삭스 부회장과는 무슨 얘기를 했나.

"미국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주시할 쪽은 유럽이라고 하더라. 국민연금 같은 장기 투자자에겐 이런 상황이 기회라는 이야기도 했다. 높은 파도는 수영 못하는 사람에겐 위기이고, 서핑 선수에겐 좋은 기회다."

―유럽 전문가들의 시각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독일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핵심인데, 결국 시스템이 와해되도록 독일이나 주요국들이 놔두지는 않을 것으로들 보고 있다. 최근 뉴욕에서 온 보고서를 보면 독일이 '즐기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유럽 사태로 유로가 저평가되고 있는데, 수출이 잘되는 독일 입장에선 상당히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빠른 해결을 위해선 독일이 많이 부담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위태로운 상태가 독일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다는 것이다."

―민간의 위기가 닥치면 국가가 최후의 방패막이가 돼준다. 국가가 위기이면 누가 구해주나.

"미국·일본·독일·프랑스 같은 나라는 재정 위기를 스스로 막을 능력이 있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피그스(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약자) 국가다. 결국 해결책은 부채 탕감이 될 것으로 본다. 세계은행에 있을 때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 문제를 몇 년간 담당했던 일이 있다. 그때 경험을 보면 국가 차원의 부채 문제는 처음엔 빚 상환 기간을 늘려주거나 금리를 낮춰 숨 쉴 여지를 주고, 그래도 안 되면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결국 그런 얘기가 나올 것이다. "

―요즘 같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자산 운용과 관련해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은.

"앞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금융시장은 변동성이 커질 것이다. 부채가 많은 기업이 수익 변동성이 심한 것처럼, 국가도 마찬가지다. 부채가 많은 국가는 경제가 잘 굴러가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기복이 심하다. 직원들에게 평소보다 신용 위험과 국가 부도 위험 등 리스크 관리에 더 신경 쓰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투자자 입장에서 기회를 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한다."

전 위원장 부임 후 국민연금은 주식과 대체 투자(부동산이나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비중을 늘리고 있다. 접견실 한쪽에는 HSBC 런던 본사 건물을 본뜬 유리 모형과 미국 송유관 회사인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의 가스관과 미국 지도를 겹쳐 만든 유리 모형이 놓여 있었다. 모두 국민연금이 투자한 곳들이다.

―위험 자산에 투자를 늘리면 국민연금 재정이 불안해지지 않나?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채권 투자 비중이 70% 가까이 된다. 이런 보수적인 포트폴리오는 세계의 대규모 연기금 중 매우 예외적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안정적인 자산에 투자를 집중할수록 국민연금 재정이 오히려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채권 수익률이 워낙 낮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향후 50년 장기 추계로 보면 6%의 연평균 수익률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미국 등 주요국은 거의 제로 금리여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그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안정성을 위해 채권에만 투자하면 기금 고갈을 앞당길 수 있다."

그는 "대체 투자를 위험 자산으로 분류하는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이 HSBC 런던 본사 건물과 베를린의 소니센터, 시드니의 오로라 플레이스 빌딩을 샀는데, 공실률이 거의 제로이고, 임대 수익률이 해당국 채권 수익률의 2배 이상입니다. 작년 10월에 1조원 이상 투자한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에서도 6~7%의 연 수익률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 3박 4일간 을지훈련을 하면서 전쟁으로 금융시장이 마비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봤다고 했다. 그는 "그런 비상 시기에 해외에 자산을 많이 갖고 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했고, 그래서 오늘 훈련을 마친 강평에서 해외 투자를 더 많이 하자고 직원들에게 얘기했다"고 전했다.

―투자 결정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특정 투자를 잘했다기보다는 국민연금이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게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본다. 과거 국민연금은 연못에서 사는 고래와 같았다. 국내에서만 장사하면 고래(국민연금)도 죽고, 연못 생태계(국내 자본시장)도 죽는다."

그는 작년 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 회장을 만난 일을 소개했다. 블랭크페인 회장은 리먼 사태 때문에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의원들로부터 질문 공세를 당하던 때였는데도 전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그는 "국민연금이 중요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됐다는 증표"라며 "하지만 국민연금은 '수퍼갑'이란 점에 현혹돼선 안 되고 책임과 실력을 더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연기금이 세계 금융시장에서 주요 자금원이 될 것이란 데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미국의 대형 사모펀드) 회장과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자금원인 은행들은 자본 조달 비용이 비싸져 자금 공급원으로서 역할이 위축되고 있다"며 "우리 같은 연기금의 파워가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고, 씨티 등 주요 은행과 연기금이 공동으로 연계해 투자하는 모델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전광우 이사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한 뒤 세계은행(IBRD)에서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국제금융 전문가다.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에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 특보로 기용되면서 한국 정부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국제금융센터 소장과 우리금융지주 부회장을 지냈고, 현 정부 들어 초대 금융위원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