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나는 썰매에 미쳐 살아왔다. 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 등 종목을 바꿔가며 남들이 한 번 나가기도 어려운 올림픽에 썰매로만 4번이나 나갔다. 썰매 3종목에서 모두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전 세계에서 처음이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국내 1호' '개척자'라 부르고, 때로는 '팔자 좋은 놈'이라고도 한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신나게 썰매 타는 직업을 가졌으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 생각과 달리, 사실 내 인생은 '운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오늘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놀랍게도 불운은 행운으로, 고난은 축복으로 바뀌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생애 첫 시련은 열두 살 때 찾아왔다. 시골 마을에서 토끼를 벗 삼아 산으로 들로 뛰놀던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의면서 졸지에 가장(家長)의 짐을 지게 됐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있어 당장 생계를 떠맡아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때론 눈물도 흘려야 했다. 덕분에 삶에 대한 책임감을 남들보다 빨리 깨닫게 됐다.
운동을 좋아해 체육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는 스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를 만큼 스키 타는 것이 좋았고 모든 것을 바쳐 훈련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훈련 도중에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하루아침에 스키를 접어야만 했다. 두 번째로 찾아온 시련 앞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에는 생소한 종목이던 루지 국가대표 선발 공고를 보게 됐다. 루지는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국내에 처음 소개된 종목으로 누운 자세로 썰매를 타기 때문에 무릎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극한의 스피드 속에서 트랙을 질주할 수 있는 담대함과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조종술이 어우러져야 하기에 내 기질과도 잘 맞았다. 루지 국가대표가 된 나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했다.
만약 무릎을 다치지 않고 스키를 계속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릴 때부터 스키를 시작한 엘리트 선수들과 격차를 좁히지 못했을 것이고 태극마크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운동선수의 지상 목표인 올림픽과 인연을 맺은 것도, 내 인생을 통째로 걸게 된 썰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처럼 고난이 복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이후 나는 국가대표로서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주변 여건이 또 한번 내 발목을 잡았다. 국내 연맹이 10대 꿈나무 선수들을 육성하겠다며 나를 포함해서 나가노올림픽에 출전했던 20대 중반 3명을 국가대표팀에서 퇴출시킨 것이다. 세 번째 좌절이었다. 운동선수로 한창 뛸 나이에 당한 일이라 더욱 기막혔다.
탈출구가 필요했던 나는 동계올림픽을 두 번 개최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가서 스포츠 마케팅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엎드려 타는 썰매 종목인 스켈레톤을 운명처럼 만났다. 사그라진 줄 알았던 썰매에 대한 열정이 스켈레톤을 접하면서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문제는 스켈레톤이 트랙을 한 번 타고 내려오는 데만 사용료 수십유로(1유로는 현재 약 1500원)를 내야 하는 비싼 운동이란 것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사치였다. 무거운 썰매를 메고 매일 수㎞씩 걸어다니며 버스요금을 아껴 훈련 비용을 모았고, 한 번 타는 것으로 여러 번 타는 효과를 내려고 열심히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교통비와 숙박비를 절약하려고 오스트리아 선수단 틈에 끼어 눈칫밥을 먹어가며 기술을 익혔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대학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인스브루크 썰매 트랙에서 스켈레톤 부문 최고 속도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현지 신문들은 '코리아 블리츠(blitz·번개)'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2002·2006년 동계올림픽에 스켈레톤 선수로 출전했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때는 썰매 종목의 종착지라 할 수 있는 봅슬레이로 또 한번 도전할 수 있었다.
2018년 '썰매 후배'들이 활약하게 될 평창 동계올림픽 역시 유치의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뼈아픈 실패가 두 번 있었다. 넘어지고 실망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마침내 이뤄낸 성취가 이처럼 소중하고 감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배들은 지금도 전용 봅슬레이가 없어 대회 때마다 중고 봅슬레이를 빌려서 타야 하고, 훈련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실업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꾸는 후배들에게 나는 꼭 말해주고 싶다. 지금 흘리는 땀과 눈물이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실패와 좌절은 성공과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