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상] 독립운동하다 숨진 19세 형이 돌아온 듯… 75세가 된 동생은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입력 2011.08.15 03:01

[오늘 66년 만에 건국훈장 받는 故이홍장 선생, 그 뒤엔 동생 창훈씨의 집념이…]
광복 사흘전 세상 뜬 형 - 일본서 중학교 재학 중
일진회 결성해 독립운동…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독립운동 증거를 찾아 - 수십년 공적 자료 추적하다
올 초에야 지역 역사책에서 형의 反日 활동 기록 발견

"동생은 이제 팔십을 내다보는데 어찌 형님은 아직도 이리 앳되시오."

14일 오후 전남 해남군 삼산면의 한 단층 기와집 대청마루에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창훈(75)씨가 낡은 흑백 사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진 속에는 교복 차림에 학사모를 쓴 날카로운 눈매의 10대 소년이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19살 어린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독립유공자 고(故) 이홍장 선생의 학창 시절 모습(오른쪽 하단 작은 사진). 전남 해남군 삼산면의 생가에서 만난 동생 이창훈(75)씨는 “형은 언제나 당당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큰 사진).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소년은 독립유공자 고(故) 이홍장(1926~1945) 선생이다. 선생은 일본 정칙학원(正則學園) 중학교 재학 중 동료들과 지하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뒤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을 3일 앞둔 1945년 8월 12일 숨졌다. 19살 여름이었다.

이 선생은 66년 만에 뒤늦게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오늘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다. 사진을 쥔 동생 이창훈씨의 눈가가 흐려졌다. "형님, 어리석은 동생이 이제서야 형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제 형님 곁에 가도 여한이 없겠소."

어릴 때부터 준수하고 총명했던 형은 일본 도쿄 정칙학원 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씨는 "방학이면 어린 동생에게 주려고 과자와 귤을 한가득 사 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독거리던 다정한 형님이었다"고 했다.

공부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형의 가슴에는 독립의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중학 3년이던 1942년 형은 일본에서 지하 결사조직인 '일진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붙잡혔다. 대한제국 시절 친일 단체와 이름은 같지만, 청년들의 항일 의지가 모인 조직이었다.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벌이려다 적발됐다. 이씨는 "형은 재판 중에도 '나는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며 법관을 향해 침을 뱉었다더라"며 "주모자인 데다 법정모욕죄 등이 더해져서 동료들보다 형량이 2배 긴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장남의 체포 소식이 전해진 뒤 700석 농사를 짓는 해남의 거부였던 이씨 집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칼을 찬 순사들이 찾아와 형의 책, 옷 등 모든 물건을 태워버렸다. 집에 오가는 사람들도 모조리 감시했다. 이씨는 "어린 시절 기억에 집에서 늘 울음소리가 났다"고 했다.

형이 돌아온 건 1945년 4월이었다. 김천소년원에서 형을 살던 중 건강이 악화돼 풀려났다고 했다. "형을 보자마자 달려가 엉엉 울었지요. 병색이 완연한데도 형은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울면 나 집에 안 들어간다'하며 제 등을 툭툭 두드렸습니다. 강한 분이셨지요."

형은 집안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올리자마자 앓아누웠다. 나날이 수척해지던 형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전기고문 등 각종 고초를 당했고 정체 모를 주사들을 맞았다고 했다. 출옥하는 날에는 한 간수가 "아까운 사람아, 당신이 맞은 주사가 좋은 게 아니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좋은 데 가서 사시오"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도 했다.

형은 광복을 3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그날도 순사들이 찾아와 '오늘 당장 시신을 묻어라'고 했다"며 "한밤에 곡도 못하고, 상여도 봉분도 못 만들고 형을 뒷산에 묻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3년 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씨는 형의 공적을 찾아 서훈을 신청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쉽지 않았다. 집에 있던 형과 관련된 자료들을 일본 순사들이 모두 태웠던 탓이다. 남은 것이라곤 작은아버지가 갖고 있던 형님 사진 한 장뿐이었다. 집 앞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이씨는 증언이라도 확보할 생각으로 오는 손님마다 붙잡고 형에 대해 물었지만 성과가 없었다. 혹여 형이 꿈에라도 나오는 날에는 울다가 깨기 일쑤였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지난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향토 사학자가 쓴 삼산면 역사책을 뒤적이던 이씨 눈이 번쩍 띄었다. '이홍장' 대목에 '반일 학생운동 주모자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병보석으로 귀가했으나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발견한 문서 기록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씨는 면사무소를 뒤지고, 역사책 편집위원을 만나 추가로 자료를 모았다. 마침 보훈처에서도 당시 형의 수감 기록을 찾아냈다. "저처럼 자료를 찾지 못한 유족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형님이 도우신 일이었지요."

이씨는 "보훈처에서는 형을 국립현충원에 모시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형님은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뜬지라 자손이 없어요. 제 자손들이 형님 무덤까지 돌보게 해야지요. 형 옆자리에 묻히는 게 이 동생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故 이홍장 선생이 66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동생 이창훈씨가 전남 해남군 삼산면 이홍장 선생의 생가에서 유일하게 남은 사진 한장을 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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