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부 6·25 납북자 첫 인정’ 숨은 주역 이미일 납북인사가족協 이사장

조선일보
  • 이하원 기자
    입력 2011.08.15 02:59 | 수정 2011.08.15 09:50

    회원들 지역구 의원 일일이 설득
    김무성 의원 등 與野 89명 서명
    작년에야 납북자 특별법 통과돼
    “어머니와 TV 가요무대 출연 등 납북자 해결위해 10년간 별짓 다해 美의회 결의안 통과에도 주력”
    “6·25 끝난 후부터 널리 알렸다면 北 어부 납치 등 생각도 못했을 것 2013년까지 ☎1661-6250 신고를”

    "저희들은 오늘의 번영과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쟁납북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를 보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가집니다. 대한민국을 지지했던 것 때문에 납북돼 희생되신 분들도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위로를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전시(戰時)납북자 55명이 정부의 인정을 받은 지난 2일, 김황식 총리가 주재한 회의에서 정부에 감사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8만2959명으로 추산되는 납북자 중에서 겨우 55명이 정부의 인정을 받았을 뿐인데도 원망하지 않았다.

    12일 본사 편집국에서 이 이사장(62)을 만났을 때 135㎝ 키의 척추장애인으로, 아버지를 납북당한 채 살아온 그에게 대한민국에 감사하는 이유를 먼저 물어봤다.

    이미일 6.25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6.25전쟁 납북자들은 건국 후, 대한민국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생긴 희생자들인데, 먹고살기 바빠서, 힘이 없어서 전쟁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일을 할 때"라고 말했다.

    ―정부가 그동안 해준 것이 없는데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가.

    "어릴 때 몸을 다쳐서 교회 기도원에 많이 다녔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이 잘 되기를 항상 기도해왔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가고 싶던 경기여중, 이화여중에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납북되고…. 그래도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불쌍해 보였다. 정부가 그동안 이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었다. 그동안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정부를 몰아세우고, 쓴소리를 해 댄 것은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전시 납북자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1945년 8·15광복도 중요하지만, 1948년의 건국이 더 중요하다. 전시 납북자들은 건국 후, 대한민국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생긴 희생자들이다. 이제는 한국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같은 나라가 아니다. 당시 정계, 의료계, 경제계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던 분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동안은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힘이 없어서 전쟁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일을 할 때다. 그게 국가(國家)가 할 일이다.”

    ―납북자 문제가 전면에 제기되면 대북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부와 여유를 누리고 사는데, 이런 좋은 세상을 못 보고 북에 억류된 이들이 8만 명을 넘는다. 그분들을 역사에 기록도 안 하고 간다는 것은 패배의식이다. 정부가 지금은 북한으로부터 수비하느라고 바쁘지만 북한의 납북 범죄를 국제사회에 제기해서 ‘북한은 범죄자’라고 압박해야 한다. (그는 이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북한에 억류 중인 오길남씨의 가족들을 구출해 내자는 ‘통영의 딸을 구해 주세요’라는 전면 광고가 신문에 실린 것을 거론했다.) 전쟁납북자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면 과연 오길남씨 가족이 겪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겠어요? 전쟁이 끝난 후부터 북한이 저지른 납북자 문제가 널리 알려졌었다면 북한이 어부들이나 학생들을 납치할 생각을 못했겠지요. 북한의 김정일은 오길남씨 가족들, 가녀린 여자와 아이들을 붙잡고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가요."

    ―이번에 납북자로 55명만 인정받은 것은 의외다.

    "맞다. 6·25 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가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납북자를 신고하라는 홍보광고가 올 초에 나갔는데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는 광고를 만들었다. 또, 대한민국이 잘못한 것만을 조사하던 분들(과거사조사위원회)이 조사관으로 선발된 것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서울시에서 신고를 받은 납북자가 전혀 반영이 안 됐는데.

    “(한숨을 쉬며) 지난해 통과된 법에는 각 시·도에서 납북자 신고를 받아 국무총리실로 올리게 돼 있다. 그런데 오세훈 서울시장과 민주당이 다수인 시 의회가 무상급식 문제로 대립하면서 이와 관련한 조례조차 통과되지 않았다. 지난 6월에 서울시 의회를 가족회에서 항의방문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 후에 서울시에서 신고를 받은 140여건은 최종심사가 되지 않아 이번 발표에서 빠졌다. 2013년까지 납북자 신고를 받으므로 아직 시간은 많이 있다. 납북피해를 신고하는 1661-6250 대표전화가 많이 알려지기 바란다.”

    지난 6월 서울에서 6.25 납북자 체험 걷기 행사에서 이미일 이사장(가운데 키 작은 인물)이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과 함께 플래카드를 든 채 걷고 있다.

    ―정부가 납북자 인정하면 어떤 효과가 있나.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는 이번에 정부가 납북자로 인정한 3명이 묻혀 있다. 당연히 유해를 돌려달라는 후속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북한을 상대로 소송도 할 수 있다."

    이 이사장은 두 살 때 유모의 실수로 댓돌에 떨어져 척추를 다친 후, 결핵균이 들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 이성환은 1950년 9월 4일 북한군에 끌려간 후, 돌아오지 못했다. 1971년 이화여대 졸업 후 서울대 미대 출신의 예술가와 결혼했으나 1987년 이혼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헤어졌다.

    ―남들은 한 번 겪기도 어려운 역경을 겹쳐서 당했는데 어떻게 납북자 일에 매진하게 됐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은 나 납북자 중독이야’라고 웃어넘긴다.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을 때만큼 나를 좌절시킨 것은 없었다. 그때 기독교인으로서 내 신앙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납북자 단체 운영은 운명 같은 것이다. 납북자 특별법 통과되고 나니까, 미 의회에 결의안 상정시키자는 목표가 생겼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맡게 된 계기가 있나.

    "어머니가 1999년쯤 심장약을 드시고 부작용이 생겨 우울증 때문에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평생 어머니 소원이 아버지 보시는 것인데….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다고 해서 신청을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9월부터 전후(戰後) 납북자단체가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시 납북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원래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때만 해도 다른 사람이 전쟁 납북자 문제에 대해 앞장설 줄 알았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모두들 쥐죽은 듯이 있었다.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안 내고…. 기다리다 못해서 몸도 부실한 내가 2001년 나서게 됐다. 8만명이 북한에 잡혀갔는데 왜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제기였다. "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을 텐데.

    "단체를 시작한 후, 올해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 모두 사업비다. 주변에서는 정부에 돈을 더 달라고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나랏돈이 어떤 돈인데, 내 돈보다 더 소중하고 끔찍한 돈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땅에 지은 작은 빌딩의 임대수입에서 한 달에 1000만원씩 털어서 직원들 월급을 준다. 납북자 일이 주업이고, 건물 관리는 부업이다."

    ―장애인의 몸으로 어려운 일도 많았겠다.

    "나는 체력이 약하다. 또, 목소리가 탁하다. 외모도 그럴듯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라면, TV에 영상보도가 잘 돼 홍보가 잘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가 상처받은 게 하나 있다. 한 공중파 방송에서 취재하는데 장애인이라서 못하겠다고 하더라. 목소리도 탁해서 듣기 좋지 않다고 하더라. 나를 바로 앞에 두고…. 아직도 방송사는 장애인이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 유보적이다. 납북자 문제 알리기 위해서라면 내가 별짓을 다 한다. 납북자 가족들이 가장 많이 보는 프로그램이 KBS 가요무대라고 해서 어머니하고 함께 나갔다. 이럴 때 내가 장애인이 아니고, 외모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납북자 특별법은 16, 17대 때 두 번이나 폐기된 후, 지난해에야 통과됐는데….

    "사무실 벽에 마치 군 작전 사령부처럼 의원들 명단과 지역구를 쫙 적어 붙였다. 그리고 그 지역에 우리 협회 회원이 누가 있나 파악해 국회의원들을 만나도록 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민들의 표를 의식하는 것을 활용했다. 한나라당김무성, 자유선진당박선영 의원이 가장 많이 도와줬다. 모두 89명의 의원들이 서명했다. 민주당김진표, 송민순 의원도 ‘이건 꼭 해야 한다’고 서명해줬다.”

    ―납북자 문제는 북한과 관련된 것인데 왜 미국 의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한가.

    "1951년 시작된 휴전회담 당사자가 미국이다. 당시 미국은 납북자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휴전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국제 사회에 납북범죄를 알리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미 하원에서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통과된 것과 같은 효과를 바라나.

    "북한의 납북 범죄는 일본의 종군 위안부 문제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협상하기보다는 북한의 민간인 납치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북한과는 협상해 봐야 소용없다. 북한은 약속 안 지키기가 다반사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북한에는 너무 성실하다.(웃음)”

    ―납북자 단체를 운영하면서 뚜렷한 북한관이 생긴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후, 도쿄재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전범 처리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이 지금 잘 먹고, 주민이 잘살면 모르겠다. 그러나 북한은 갈수록 더 아니다. "

    ―3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해도 우리 사회에 여전히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진실은 영원히 녹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친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진실을 외면하는 편에 설 것인가, 진실을 드러내는 편에 설 것인가. 나는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좌우한다고 본다. 그것이 국가이든지 한 사람의 일생이든지 간에….”

    인터뷰를 마친 후 한 공중파 방송에서 난색을 표명했다는 그의 탁한 목소리는 더 갈라져 있었지만, 결기(決氣)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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