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고령화 등으로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건강보험료를 지속적으로 인상하고 본인 부담금을 차등화하라"고 권고했다. 선진국들에 비해 적게 내고(저부담) 적은 혜택을 받는(저보장)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8일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고위 간부가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를 방문해 가진 회의에서 WHO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 개선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면서 "현재 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가 (권고안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WHO의 권고 내용을 중장기적 보건의료제도 개선과제를 논의하는 '보건의료미래위원회'에 보고해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WHO 같은 국제 기구가 특정 국가의 건강보험 정책에 대해 직접 조언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건보료 인상해 보장성 높여라

WHO는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 적자를 막고 국민들의 진료비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①건보료 인상 ②본인 부담금 차등화 ③의료 수가(酬價) 조정 ④성분명 약 처방 도입 검토 등 크게 4가지를 제안했다.

WHO가 가장 강조한 것은 '점진적이고 투명한 보험료 인상'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의 의료 복지를 지향하면서도 국민들이 내는 건보료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과 비교해 크게 낮아, 보장성(전체 진료비에서 건강보험이 내주는 돈의 비율)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WHO의 분석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내는 건보료는 연간 소득의 2.54%로, 독일(7.0%)이나 프랑스(6.2%)의 절반 이하이며 대만(4.55%)보다도 낮다. 건보료의 영향을 받는 보장률 역시 네덜란드(93.4%), 영국(88.3%)보다 크게 낮은 64.5%에 머물고 있다.

WHO는 "한국은 보험료 인상이 정치적인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보험료 증가분을 단순한 비용으로 접근하지 말고, 앞으로 낼 병원비를 미리 낸다는 입장에서 국민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라"고 제안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재정은 지난해 1조3000억원 적자를 냈다. 올해의 경우 연말 정산 보험료가 지난해보다 6500억원 늘어 적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보공단은 밝히고 있지만, 고령화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 건보재정의 압박은 계속될 전망이다.

본인부담금도 소득 따라 차등화

또한 WHO는 소득·나이·진료 기록에 따라 개인이 내는 진료비에 차이를 두라고 제안했다. 일본의 경우 똑같은 진료라도 연령과 소득 수준에 따라 본인 부담금이 다르다.

특정 진료과목에 의료 서비스가 편중되지 않도록 의료 수가(의사·병원에 주는 보수)를 대폭 조정하라는 것도 WHO의 권고 내용에 포함됐다. 건보 재정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약가(藥價)를 줄이기 위해 보험 대상 의약품 수를 현재의 1만5000개에서 2000~3000여개로 대폭 줄이고, 의사가 약의 이름이 아닌 약의 성분으로 처방전을 쓰는 '성분명 처방'도 고려해야 한다고 WHO는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