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1] 나의 노래 공포증

조선일보
입력 2011.08.05 03:03 | 수정 2011.08.05 14:48

자신있게 나간 동요 노래자랑… "윤형주 어린이, 땡입니다"
잘했지만 아차! 가사 틀리는 실수
아나운서는 봐주자고 했지만 믿었던 아이들이 "딩동댕 안돼요"
이후 사람들 앞에 서면 덜덜 떨어

이쯤에서 '가수 윤형주'의 얘기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의 노래 인생이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전개돼 왔는지 말하려 한다.

1968년 트윈폴리오로 데뷔하고 많은 공연을 다녔다. 매년 평균 80곳의 교회에서 공연했다. 20년간 꾸준히 해왔으니 그것만 따져도 1600회다. 그 외에 트윈폴리오 공연, 송창식 김세환과 함께한 빅3 콘서트, 솔로 공연, 최근 세시봉 전국 순회공연까지 합치면 2500회를 넘어설 것이다.

22만명 앞에서 사회를 본 적도 있다. 1996년에 2002 한·일월드컵 개최가 확정됐다. MBC가 급하게 특별공연을 준비했다. 그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진행된 생방송 프로그램 MC를 내가 맡았다.

연세대 의예과 1학년이던 1966년 집에서 옷을 다림질하면서 어머니 김귀순(왼쪽) 여사와 함께 포즈를 취한 윤형주. 김 여사는 올해 92세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윤형주 제공

실내 공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건 198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포크 페스티벌이다.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양희은 조동진 이종용 이장희 등과 함께 LA'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에서 공연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곳이다.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많은 교포들이 몰려왔다. 6308석이 모두 매진됐다. 당시 실내를 메운 박수 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극장에서 25년 만에 지난달 23일 세시봉 친구들 공연을 다시 했으니 감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무대에 섰고,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했다. 그랬던 내게도 처절한 무대 경험이 있다. 그것도 첫 방송 데뷔 무대였다. 그 후유증으로 수년간 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길 꺼려했다.

서울 효창초등학교 2학년 때다. 한창 음악을 배우며 즐겨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었다.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6남매 모두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노래에도 웬만큼 자신 있었다. 어머니에게 들었는지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어린이 노래자랑에 나가보자."

두 가지 이유로 짐작된다. 하나는 내게 좋은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 다른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

그렇게 해서 KBS '누가누가 잘하나'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사회는 현재 전통예절 교육기관 예지원 원장인 강영숙 전 아나운서, 반주 겸 심사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작곡했던 한용희 선생님이 맡았다.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무대에 섰다. 내가 불러야 할 곡은 '내 주먹'이란 동요였다. 가사는 간단했다.'조그만 주먹이라/너희들은 흉보지만/이래 봬도 어림없다/단단하다 튼튼하다.'

곡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 선생님이"딩동"까지 치곤 멈칫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강 아나운서가 말했다."우리 윤형주 어린이가 가사는 조금 바꿔 불렀지만 잘 불렀으니까 맞는 걸로 할까요?"

머릿속이 하얘졌다.'단단하다 튼튼하다'를 '튼튼하다 단단하다'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도 기대했다.'이쯤은…'이라고 생각했다.'아이들이 응원해주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당시 스튜디오엔 300명 정도의 비슷한 또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안돼요, 안돼요"라고 외쳤다. 모두 반대했다. 한 선생님이"댕"대신"땡"을 쳤다. 강 아나운서가 말을 이었다."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도전하세요. 자, 다음 어린이."

충격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네 칸이 수십 미터 낭떠러지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시에 미워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행했던 아버지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물만두와 자장면을 사줬으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후유증은 오래갔다. 그 뒤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무서웠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마저 떨렸다. 당시 나는 반장이었다.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전할 때 내 목소리는 작아 교실 뒤까지 가 닿지 못했다. 그 때문에 반 전체가 기합을 받은 적도 많다. 반 아이들이"반장 좀 똑바로 해. 안 들리잖아"라고 투덜대도 나아지지 않았다.

대광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시간에 합창은 했으되 독창은 하지 않았다. 소풍 전날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락시간 때문이었다. 당시 즐겨 했던 게임이 수건 돌리기 놀이다. 벌칙이 노래 부르기였다. 한 번 걸렸다가 끝까지 노래 안 하고 버티느라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소풍을 갈 때면 숲에 한 시간 넘게 숨어 있곤 했다.

[키워드]  세시봉//search.chosun.com/search/total.search?categoryname=&categoryd2=&query=%EB%9D%BC%EC%9D%B4%EB%B8%8C+%EA%B3%B5%EC%97%B0" target=_blank>라이브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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